[Opinion]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자각하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 [영화]

태양처럼 타오르다가도 일몰처럼 한순간에 몰락하는 삶, 영화 <썬다운>
글 입력 2023.01.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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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썬다운’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썬다운>의 주인공이자 부유층 영국 남성인 ‘닐’은 그의 여동생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두 조카들과 함께 멕시코의 항구 도시 아카풀코에서 휴가를 맞이한다.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값비싼 와인과 레스토랑 음식을 먹고, 수영장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기도 하며 남부럽지 않은 평온한 나날들을 보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닐과 앨리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들려온다. 넷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급히 짐을 싸서 공항으로 출발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앨리스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닐은 이상하리만치 태연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닐은 그제야 여권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호텔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먼저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면서 영화의 이야기는 흘러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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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닐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가 매우 무덤덤하거나 감정을 겉으로 쉬이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닐은 영화 내내 이상하다 못해 기이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여권을 호텔에 놓고 왔다는 그의 말도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카풀코의 바다에 혼자 머물며 일광욕을 즐긴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앨리스의 연락은 무시하면서도, 현지인 ‘베레니스’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바닷가에 놀러 온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술을 마시기까지 한다.


그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앨리스가 멕시코로 다시 찾아와 분노하고 어머니의 장례식과 재산 상속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닐은 그저 무표정으로 자신의 몫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이야기한다. 당최 의중을 알 수 없는 언행뿐이다.


이렇게 작중 닐은 살아가는 이유 없이 그저 세상에 던져진 것처럼, 즉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고 가만히 부유하는 존재인 것처럼 초지일관 무덤덤한 태도로 살아간다. 세속의 상징인 휴대폰을 서랍 깊숙이 던져 넣어버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찾아가지 않고, 유산 배분과 가족의 일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관객은 영화 내내 그가 하는 행동의 이유와 영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서늘하고 어쩔 땐 섬찟하기까지 한 그의 무감정과 비윤리적인 일탈을 숨죽이며 따라가게 된다. 이 영화의 장르가 미스터리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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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이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끔 만드는 일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사실은 그의 몸에 이미 암세포가 심각하게 전이된 상태였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닐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머니의 죽음마저 겪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격식을 차려 지내야 하는, 어쩌면 형식적일지도 모르는 절차인 장례식과 재산 배분 등 금전적인 문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고 짐작해 본다.


그는 죽음 앞에서 가까웠던 가족들과 서서히 멀어지며, 삶의 덧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자각의 단계 속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닐까.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처럼 세상의 부조리함과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을 자각하며 죽음 그리고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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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이 머물렀던 아카풀코라는 도시는 이중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닐과 같은 부호들이 휴양지로 삼고 놀러 오는 곳이기도 했지만, 정작 도시 변두리 동네의 주민들은 가난하고 남루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마약 카르텔의 총격전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가난을 이유로 절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이들이 삶을 간신히 영위해 나가는 곳이었다.


작중 배경이 부와 가난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소라는 점, 그리고 삶에 대한 권태를 느끼는 주체가 부르주아를 상징하는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미뤄봤을 때, 영화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함과 물질적, 세속적 가치에 대한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또한, 그와 동시에 실존적 가치관 자체에 대한 의문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금전적 문제로 인해 당장이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아카풀코의 현지인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부조리하게 느끼고 초연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새일 수 있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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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던 닐도 죽음의 순간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작중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닐의 상태를 한 마리의 죽어가는 돼지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돼지는 닐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로, 두려움으로 인해 그의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환각이다.


교도소 샤워실에 쓰러져 누워있던 돼지, 그리고 닐이 쓰러지기 직전 베레니스의 집 계단 위에 배가 갈라진 채 죽어있는 돼지. 닐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돼지에 투영한 것이다. 


왜 하필 돼지일까. 닐의 가족이 도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가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렴풋이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있다. 가축을 잡아 죽임으로써 억만장자가 된 닐은 결국 축사에 가만히 갇혀 도살되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돼지들처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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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없는 죽음은 태양을 대하는 닐의 태도로도 상징된다. 아카풀코로 휴가를 온 이들은 대부분 뜨거운 태양이 선물해 주는 따뜻한 날씨를 반긴다. 반면 닐은 휴가 내내 그 태양을 보며 달갑지 않아 한다. 태양을 흘겨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태양빛을 받아 따갑게 벗겨지는 살갗을 직접 떼어내 버린다.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닐에게는 사람들의 휴가를 따사롭게 빛내주는 태양이 자신의 불행을 비웃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닐은 무자비하고 일방적으로 내리쬐는 태양의 폭력을 너무나도 피하고 싶어 했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태양은 곧 삶이자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삶과 죽음에게서 절대 도망칠 수 없다. 피할 수 없고, 타오를 듯 뜨겁지만, 일몰의 시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몰락하고 마는 태양은 삶이면서 죽음이다.


<썬다운>은 일몰을 말하는 영화다. 뜨겁게 불타던 태양이 지듯이 한 사람의 삶이 꺼져가는 순간을 그린다. 그리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삶의 허무와 무의미함을 자각한 후, 초연하고 권태로운 태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닐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와 죽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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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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