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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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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줘>는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주인공 팬지와 주변 가족들의 관계에 대해 집중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팬지는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로 인해 늘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편두통, 복통, 치통은 일상이고 결벽증 증상까지 보인다. 남들의 눈에는 윤기 날 정도로 깨끗한 소파도 팬지에게는 세균 덩어리다. 식탁과 소파를 끊임없이 물티슈로 닦는 분주한 몸짓, 정원에 개나 여우라도 들어오면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 외출하고 온 날은 종일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는 무력함이 그녀의 상태를 대변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팬지의 레이더가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물론 함께 사는 가족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하는 22살 아들 모지스는 그녀에겐 골칫거리일 뿐이고, 수리업자로 일하는 남편 커틀리는 팬지의 상태가 어떻든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여동생 샨텔과는 비교적 사이가 좋은 듯하지만 어머니가 생전에 자신보다 동생을 더 사랑했다고 확신해 괜한 심술을 부리기 일쑤다. 트러블을 일으키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민하고 공격적인 팬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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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의 주변에는 늘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할 말 다 하는 그녀의 저주받은 입 덕분이다. 가구 가게, 주차장, 마트 계산대, 치과까지 가는 곳마다 말 걸어오는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시비를 건다.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고 할 말 못 할 말 전부 내뱉는 언행은 무례하다 못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팬지를 마주친다면 그날 하루 전부를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무례하고 예의 없는 모습에 적대감이 생기려 할 찰나, 영화는 언쟁 뒤에 홀로 남겨진 팬지의 표정을 비춘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잔뜩 찌푸려진 미간에 울기 직전의 모양처럼 삐죽거리는 입을 본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나 분노가 쉽게 솟아올라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인지하게 된다. 차 운전석이나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팬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괴로움과 슬픔을 읽는다.

 

팬지의 감정을 따라가며 그녀가 하는 모든 언행의 기저에는 깊은 불안이 깔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평온한 일상을 지내기 어렵고 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스스로가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밖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뿐 아니라 가까운 가족마저도 모두 자신을 미워한다는 생각에 갈수록 불안이 쌓인다. 본인에게 주어진 생을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 팬지가 인지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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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가 내비치는 극심한 짜증과 우울에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팬지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동생 샨텔이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샨텔은 항상 호쾌한 웃음으로 고객들을 대하고, 두 딸과는 친근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상태를 섬세하게 살피는 특유의 다정함으로 팬지에게도 계속 관심을 둔다.

 

샨텔은 팬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알고, 또 가족으로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고 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팬지의 막말을 웃으며 넘기거나 재치 있게 대응하는 데도 능숙하고, 도저히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맞서서 화를 내기도 하는 모습이 샨텔의 섬세하고 솔직한 성정을 대변한다. 팬지에게는 때때로 '언니를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랑해'처럼 단순하지만 무한한 애정이 담긴 한 마디의 포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팬지가 속에 있는 상처를 처음으로 내보이는 순간도 샨텔과 함께일 때다. 어머니 5주기가 되어 묘지에 찾아간 날, 팬지는 샨텔 앞에서 울다 못해 오열한다. 신경질을 내며 독설을 퍼붓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유약한 모습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 그리고 이유 모를 불안감과 극심한 우울까지. 자신이 느끼는 삶의 고통스러움을 모두 내뱉는다. '왜 남들처럼 인생을 즐기지 못해'라는 물음에 '나도 몰라'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팬지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 안에 오랫동안 쌓여왔을 답답함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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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지는 외롭지 않기를 바라 결혼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새 가족을 만들고 나서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 커틀리와 모지스 역시 각자의 괴로움을 껴안고 살기에 팬지의 신경질마다 대응하기는 역부족이다. 짐작건대 커틀리는 직장과 일상에서 겪는 고충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외로워하고, 모지스는 학생 때 괴롭힘을 당했던 일로 인해 우울증 증상을 보이며 힘겨워한다. 그렇게 집에서도 입과 귀를 닫길 택한 가족 앞에서 팬지는 매일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을 느꼈을 테다.

 

사실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팬지에게 내내 무관심한 두 사람을 보며 잠시간 분노했다. 그러나 동시에 팬지뿐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 때문에 고달픈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어떤 인물도 쉽게 탓할 수가 없다.

 

영화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삶과 와해된 가족의 모습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각자가 힘겹고 버거운 이유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삶도, 가족이라는 관계도 어쩌면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눈을 뜨기 싫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이 두렵고, 그래서 차라리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지긋지긋한 우울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기에 해소되기도 어렵다. 억눌러 온 모든 불안과 슬픔을 더 이상 몸 안에 가둬놓지 못하게 된 팬지의 괴로움을 따라가며, 삶과 관계의 냉혹한 진실을 낱낱이 헤아리는 영화의 시선이 무섭도록 정확해서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삶에 고통'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나. 후반부, 팬지는 모지스가 어머니의 날을 맞아 용기 내 사 온 꽃다발에 울음을 터뜨린다. 동식물을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꽃다발의 포장을 조심스레 풀어 물병에 꽂아놓는 순간을 통해 영화는 슬쩍 희망을 환기시킨다. 이내 '고맙다, 모지스'라는 팬지의 한 마디와, 광장에서 헤드폰을 낀 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는 모지스의 모습이 이어지며 변화의 가능성이 비친다.

 

영화의 마지막, 커틀리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괴롭다고 말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팬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눈물인지, 내지는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직감하고 흘리는 외로움과 절망의 눈물인지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분명한 사실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팬지와 커틀리가 완전한 끝을 맞게 될지, 아니면 둘 중 누군가가 서서히 상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용기를 낼지는 알 수 없으나,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의 변화에 대한 현실적인 통찰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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