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동그란 입안엔 집이 있어 거기 낱말이 살아, '흉터 쿠키'

글 입력 2022.11.0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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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나에게 늘 반전을 선사한다.

 

얇은 두께에 만만한 마음으로 가볍게 집어 들기 일쑤지만, 이내 처음 보는 단어들의 조합 앞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그만 내려놓고 만다. 그래도 나는 또다시 시집을 집어 든다. 읽어내고 싶다는 마음속 욕망이 더 큰 탓이다.

 

오랜만에 집어 든 시집은 이혜미 시인의 <흉터 쿠키>였다. 제목이 참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흉터'라는 아픈 단어가 쓰였음에도 '쿠키'라는 부드러운 단어와 만나니 왠지 따뜻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시집의 제목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나는 지금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일 뿐 알쏭달쏭한 기분에 몇 번이고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방도가 없다. 내가 이해한 몇몇 문장들을 위주로 소감을 남기는 수밖에는. 시집의 전부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나를 이해해달라.

 

 

<움>

  

뜻과 의미의 둘레를 믿고 있어

 

발음하면 동그랗게

입술이 모여드는 자리를

 

옮겨 심은 묘목의 당혹

끝나지 않는 산책로와

손 닿지 않는 서성임에 대해

 

돋아나는 기억과

바람의 앞니에 대해 듣고 싶어

 

짐작한 색으로 문장을 칠하고

공기를 헤아려 쌓는다면

감정에도 거처를 지어줄 수 있을까

 

알고 싶어

네가 가져온 반짝임이

어디까지 이르는지

 

기다린다

 

쏟아지는 낱말들의 집이 되려고

 

pp. 48-49

 


제목을 보고 두 가지 의미가 떠올랐다. 하나는 입을 동그랗게 쭉 내밀고 만드는 소리. 둘은 움집. 다행히 시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었다. 시는 낱말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입을 동그랗게 쭉 내밀어보면, 입안에 동그란 공간이 생긴다. 낱말은 그 공간 안에 산다. 발생과 동시에 흩어진다고,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낱말이 사실은 우리의 입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로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하루의 가장 많은 부분을 채우는 말. 낱말과 낱말이 모여 문장을 만들고 문장과 문장이 모여 이야기가 된다. 나의 말과 너의 말이 모여 관계가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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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뜻과 의미가 잘 담겨 있는 말은 나의 입을 거쳐 너의 입안으로 전해진다.

너의 입안 속 공간에 살며 너의 기분이 되고 감정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말을 잘 해야만 해.

 

<흉터 쿠키>는 유독 단어를 고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주는 시집이었다. 비슷한 소리를 가진 단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 그 연결고리 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 <움>을 읽으니, 일상의 매 순간 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말로서 마음을 전달하고 또 말로 인해 상처를 받는 우리가 떠올랐다. 심지어 감정이라는 거대한 파도마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말. 하지만 결국 그 감정을 헤아리고 보듬는 것 또한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 말을 숙성시키는 집의 역할이 참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흉터 쿠키>를 읽으며 나도 시 속 단어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정성 들여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나의 낱말 중 그 어느 것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오히려 그 사람의 입안 속 공간에 살포시 내려앉아 오래도록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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