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인생도 깨끗이 빨 수 있다면 - 빨래 [공연]

글 입력 2022.09.2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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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학로를 찾았다. 대학로의 대표 뮤지컬, 빨래를 보기 위함이다. 엔데믹인 요즘 대학로엔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과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학로의 공연장이 가득 찬 것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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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는 2005년 초연을 시작으로 17여 년간 여러 차례 상을  받으며 창작 뮤지컬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2012년 일본 레플리카 진출부터 올해 중국 라이센스 수출이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인 만큼, 설렘과 기대 가득한 맘으로 공연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숨죽인 채로 무대의 조명이 켜지길 기다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빨래란


 

이 극에서는 각자의 꿈을 갖고 서울로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가 좋아 작가의 꿈을 품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홀로 찾아온 나영. 어느덧 서울살이 5년 차다. 그동안 학교를 다니고 생계를 유지하느라 꿈은 흐려져만 가고 그녀의 직업은 서점 직원이다.

 

서울살이 5년 차 몽골 청년 솔롱고. 무지개라는 뜻이다. 무지개처럼 꿈을 좇아 한국에 왔다. 러시아문학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어 한국으로 돈을 벌러 왔다. 그러나 그는 불법 체류자에 공장 노동자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월급을 제때 받지도 못하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둘은 가까운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가 마주치게 된다. 어느 날 바람에 날려온 나영의 빨래 덕분에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나영은 부당한 일에 맞서다 불이익을 당하고 솔롱고는 하루아침에 공장에서 해고당하고 월급조차 밀릴 위기다. 둘은 같은 하늘 아래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

 

나영은 쉬는 날 빨래를 하며 인생의 아픔을 씻어내는 노래를 한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빨래>, #8 빨래

 

 

빨래를 보면 그 집안 사정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나영이 세들어 살고 있는 주인할매 집 앞 빨랫줄에는 하얀 천이 가득하다. 주인할매도 그만의 사연이 있었는데, 그에겐 40년째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딸이 있다. 할매는 딸 둘과 자신의 인생의 씁쓸한 감정을 빨래를 하며 털어버린다.

 

 

 

얼룩같은 슬픔일랑

빨아서 헹궈버리자

먼지같은 걱정일랑

털어서 날려버리자

 

<빨래>, #9 내 딸 둘아!

 

 

사람들은 빨래를 통해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빨래로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먼지를 털어내고, 주름을 펴듯이 슬픔을 씻어내고, 상처를 털어내고, 부정적인 감정을 훨훨 날려보내며 오늘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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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씨에이치수박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니 눈물도 마를 거야

 

<빨래>, #16 슬플 땐 빨래를 해


 

나영에게 주인할매와 옆방에 살고 있는 희정엄마는 빨래를 통해 나영을 위로한다. 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라 한다. 물 흐르듯이 살라.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힘든  일이 찾아오면 받아들이고 시간이 흐르면 빨래가 마르고 눈물이 마르듯 힘든일도 지나갈 것이라 노래하며 나영에게, 관객에게 힘을 준다.


빨래를 하다 보면, 빨래를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 보면, 살아갈 힘이 남아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빨래가 끝난 후 깨끗해지고 잘 마른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며 잘 마른 빨래 이불을 힘차게 턴다.

 

부당한 일 앞에서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움츠러들어 있던 나영은 그 둘의 위로를 듣고 일어나 잘 마른 이불을 드나들며 '기분 좋은 나'를 걸치기 시작한다.

 

'빨래'라는 행위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담겨있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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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의 마지막 버스씬에서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버스기사, 직장인, 학생,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 일용직 노동자. 그들은 모두 흔들리는 꿈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흔들리는 버스처럼 살아가다 보면 그 꿈들은, 그 희망들은 흩어지고 만다. 현실 앞에서 꿈은 미뤄지고 희미해지곤 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거리의 사람들은 이 외롭고 쓸쓸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겨우 막을 만한 우산 하나로 이 어려움을 피하며 살아간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데 문득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이 느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나와 노래하고 우리가 한 번쯤은 겪어본 일을 이야기하며, 그 안에서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간다.


나의 삶을 위로해 주는 예술 앞에서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서글프고 힘든 우리 삶이지만 빨래의 등장인물들은 그 안에서도 얼룩을 빨래로 지워내며, 잘 마른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빨래를 하고 난 후 옷이 뽀송해지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빨래'라는 작품을 보고 난 후 힘든 마음들을 위로받아 마음이 뽀송해졌다. 울고 웃고 공감하며 하루를 살아낸 힘을 얻은 것 같다. 조만간 내 삶에 얼룩이 지고 구겨지면 다시 '빨래'를 하러 대학로를 찾아야겠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아트인사이트] 이소희 컬쳐리스트.jpg

 

 

[이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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