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한여름의 할로윈- 2022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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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 소식을 들으며 여름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올 여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7년 시작해 어느덧 26회를 맞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지난 7월 7일부터 17일까지 부천시청 잔디광장 및 어울마당, 판타스틱 큐브, 한국만화박물관, cgv소풍, 메가박스 부천스타필드시티 등지에서 열렸다.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해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장르 영화를 선보이며 장르 영화 마니아의 눈길을 끄는 영화제로 손꼽힌다.
올해에는 개막작과 패막작을 포함해 총 12개의 섹션에 49개국 268편의 작품이 관객을 찾아갔다. 몇 년 전부터 보편화된 온라인 상영을 오프라인 상영과 병행하며 관객 접근성을 높이는 한편, 거리두기 조치 해제로 다시 모일 수 있게 된 관객들을 위한 오프라인 행사도 다수 마련되었다.
오프라인 행사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영화관에서, 그리고 온라인 상영으로 세 편의 작품 <헬 벤더>, <지옥의 화원>, <하얀 차를 탄 여자>를 관람했다. 각각 정통 호러 영화들을 모은 '아드레날린 가이드', 산뜻하고 톡톡 튀는 코미디, 판타지 영화들로 이루어진 '메리 고 라운드', 국내 경쟁 섹션으로 한국 장/단편 장르영화를 모은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에 속한 작품이다. 영화제의 규모를 생각하면 살짝 맛만 본 셈이지만 그 맛이 궁금한 이들을 위해 짧은 리뷰를 공유해본다.
아래의 리뷰에는 각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헬 벤더(Hellbender)>: 봄은 겨울을, 여름은 봄을 먹는다
오래된 괴담이 있다. 목을 매달아도, 불에 태워도, 총을 쏘아도 죽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고. '헬벤더'라 불리는 이들은 살아 있는 것의 피를 먹고 거기에 녹아든 공포에서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작은 애벌레를 먹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들이 사람을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10대 소녀 이지는 깊은 산 속 외딴집에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다. 학교는커녕 또래를 만나본 적도 없는 이지의 세계는 엄마와 함께하는 밴드, 그리고 광활한 숲이 전부다. 도시로 나가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은 가끔 시내에 나가는 엄마에게 부탁해 얻는 수밖에 없다. 이지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엄마의 말을 믿지만, 외로움은 병에 대한 공포를 넘어선다. 우연히 숲속의 별장에서 만난 또래들과 가까워진 이지는 서서히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억눌러왔던 힘을 개방한다.
이윽고 이지에게 비밀이 생겨난다. 서로밖에 없던 엄마와 딸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헬벤더>는 오컬트 영화로도, 고전적인 공포 영화로도 보기 좋은 작품이지만 그 안에서 두드러지는 서사는 이지라는 소녀의 성장이다. 영화에서 이지의 엄마는 봄은 겨울을 먹고 여름은 봄을 먹는다고 말한다. 그 대사처럼 영화 속 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향해간다. 그 시간을 지나며 순진하고 연약하던 이지는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고 그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며 점점 변해간다.
자식은 부모를 파먹으며 성장한다. <헬벤더>에서는 이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 헬벤더가 죽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눈치 빠른 관객은 봄이 겨울을 먹는다는 엄마의 대사에서부터 알아챌 것이다. 결국 헬벤더 모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한겨울이 되고, 이제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도시에 나가는 것은 이지다.
자식이 부모를 넘어서는 일, 더 이상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일은 공포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막아보려 한들 계절이 흐르듯이 말이다. 이지는 타락하거나 욕망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딸은 엄마와의 내밀한 세계를 부수고 바깥으로 나가 엄마가 금지한 것에 손을 뻗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헬벤더>는 헬벤더라는 오컬트적인 존재를 가져와 장르영화의 특성을 십분 살리면서 엄마와 딸의 관계, 그리고 딸의 성장을 그린 영화다.
<지옥의 화원(地獄の花園)>: 피 땀 눈물로 얼룩진 여직원의 세계
같은 회사로 출근해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지만, 남자 직원들은 알지 못하는 여직원들의 세계가 있다. 수다나 은밀한 질투 따위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이루어진 냉혹한 싸움의 세계다.
설정부터 범상치 않은 <지옥의 화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B급을 표방하는 코미디 영화임을 드러낸다. 회사 안에는 각각의 여직원 파(派)가 존재하는데, 그 회사를 평정하는 세력은 패싸움으로 결정된다. 기세를 잡은 세력은 또 다른 회사의 우두머리 세력과 싸우며 몸집을 불려 나간다. 일본의 양키물, 우리나라 학원일진물의 기본이 되는 이 설정을 <지옥의 화원>은 지극히 평범한 회사의 여직원들에게 적용시키며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각 파의 여성들, 그리고 그들이 주먹과 발을 날리며 말 그대로 '피 터지게' 싸우는 모습도 신선하다.
양키물에서 볼 수 있는 클리셰도 빠지지 않는다. 갑자기 등장한 전학생(영화에서는 신입사원 '란')이 알고 보니 숨겨진 고수였다는 설정, 게다가 그런 전학생은 꼭 평범한 친구와 친해지는데 훗날 이 친구가 조직 간 싸움의 미끼로 붙잡히는 전개, 보스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물리치면 뒤늦게 등장하는 ‘진짜 최종보스’의 존재 등 ‘설마 이렇게 되겠어’라고 생각하면, 진짜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재미다.
물론 클리셰 비틀기도 등장한다. 이 이야기가 주인공 같은 신입사원 란의 시점이 아니라 평범함 그 자체인 친구 나오코의 시점과 목소리로 전개되는 데 그 힌트가 있다. ‘진짜 최종보스’만이 아니라 ‘진짜 주인공’도 따로 있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고 보는 코미디 영화라지만 갑자기 등장한 남자에 의해 마지막 승패가 결정되는 결말은 아쉽다. 아무리 피터지는 싸움을 해도 결국 히로인의 사랑을 받는 자가 승자라는, 양키물에 나올 법한 우스갯소리를 성별 반전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앞서 보여줬던 여직원들의 주먹과 눈물을 떠올리면 김새는 엔딩이다.
<하얀 차를 탄 여자>: 스스로를 구원하는 여성들
꽃사슴을 다섯 번 말해 봐.
꽃사슴 꽃사슴 꽃사슴 꽃사슴 꽃사슴
산타가 타고 다니는 것은?
알쏭달쏭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하얀 차를 탄 여자>는 관객이 질문에 답할 사이도 없이 급박한 상황을 던져준다. 추운 겨울날 패닉 상태에 빠진 여자가 칼에 찔리고 양손이 부러져 의식불명인 여성을 조수석에 병원 앞에 내린 것이다. 두 여자의 신원과 관계, 병원까지 오게 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관객은 동네 경찰 현주와 함께 추리를 시작해야 한다.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방불명이거나 병실에 누워 있으므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경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도경이 제공하는 정보가 늘어날수록 관객은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될 때마다 영화 속 사건은 다시 재현되고, 관객은 앞서 받았던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산타가 타고 다니는 게 루돌프라고 답했다면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 산타가 타고 다니는 것은 사슴이 아니라 사슴이 끄는 썰매이므로.
허를 찌르는 추리게임 못지않게 관객을 이입하게 하는 것은 영화 속 세 여자가 받은 상처와, 이 상처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이다. 도경은 언니로부터 감금당한 채 고난의 시간을 보냈고, 미경은 범죄자에게 동생을 잃었으며, 서현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다. 흔히 스릴러물에서 여성이 겪는 피해는 추리게임을 위한 서사 장치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일어나야 추리를 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뒤따르므로 사건의 희생자 역할을 맡는 식이다.
<하얀 차를 탄 여자> 속 세 여자는 상처입은 희생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연히 살아남은 생존자도 아니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생존을 '쟁취해내는' 쪽에 가깝다. 여자들은 지옥도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로를 구원한다. 다른 스릴러/추리 영화를 보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쾌감 이면에 이야기를 위해 희생당한 이들에게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라면, 만족스럽게 엔딩 크레딧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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