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영화가 만나] 산골짜기에서 영화 보기 2 - 2022 무주산골영화제

글 입력 2022.07.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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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본 산골짜기 야외극장은 뭐랄까, 의외였다. 생각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열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디밭 앞에 놓인 스크린의 크기는 적당히 큼지막했고, 외부 소음이 한층 덧대어져 들리는 영화 소리는 생생한 현장감을 경험케 했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산골짜기로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40도쯤 기울어진 언덕의 경사도 역시 완벽했다. 사방이 잔디로 뒤덮인 그 경사진 녹색 언덕은 이상적인 실내극장의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언덕 아래쪽에 자리가 모두 차 있었다. 그곳이 영화를 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한국인들은 새삼 부지런하다고 생각하며 다음번엔 더 일찍 도착해야겠다고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다짐했다. 언덕배기에는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영과 나는 언덕 중턱에 멈춰 섰다. 최대한 가까이서 스크린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되도록 시야에 화면이 꽉 들어차는 걸 좋아했고, 영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으므로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 만족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우뚝 선 나무들과 산골짜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위로 땅거미가 가라앉는 중이었다. 큼지막한 스크린 뒤로 더 큼지막한 산등성이가 어둠에 깔린 채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풍경이 조금 아득하게 느껴져서 나는 영화를 보다가도 힐끔힐끔 화면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어둠이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언덕 중턱에 도착하여 슬금슬금 돗자리를 펴고 있을 때는 이미 영화의 오프닝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비포 선라이즈> 속 두 주인공이 기차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장면을 놓칠세라 힐끔힐끔 화면을 올려다보았는데 야속하게도 가져온 짐들을 모두 풀어놓는 사이 영화의 오프닝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역시 지각쟁이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두 주인공은 어느새 기차 휴게실로 옮겨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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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연신 소리를 질렀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으악, 레코드판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 으악, 허공의 전화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으아아악···. 두 사람의 은근한 눈빛과 우연한 만남에는 낭만, 낭만, 낭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더하여 낭만이란 것은 알코올 없이도 사람을 자주 취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나는 와인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빠르게 취해갈 수 있었다. 어쩌면 첫 만남서부터 헤어짐이 예견된 두 사람의 여정에 또다시 마음을 내어놓고 동참하기로 다짐한 건, 이 낭만에 대한 전적인 믿음 때문일 테다.

 

여타 로맨스 영화와 달리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은 두 사람의 대화에 많은 부분 기반하고 있다. '대화'는 이 시리즈를 완성 짓는 결정적인 요소이자 두 남녀를 끊임없이 갈라치고 이어주는 운명과도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비포 시리즈의 영화들은 모두 말이 많다.

 

갈수록 대사들이 무지하게 빨라지고 많아졌다. <비포 선셋>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영이 말을 걸어왔다. 소곤소곤, 영화가 말이 너무 많네. 끄덕끄덕, 그러게 말이야. 영과 같이 조금 멍해진 나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에 드문드문 별들이 박혀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영화라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센치해져 옆에 놓인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다. 홀짝홀짝 와인을 들이키는 사이 <비포 선셋>이 끝나고 <비포 미드나잇>까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이제야 시리즈를 끝마쳤다는 아쉬움, 뿌듯함, 해방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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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비포 시리즈’가 놀라웠던 건 세 편의 영화가 장장 20년에 걸친 세월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극 중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말이다. 관객으로서 배우와 작품이 함께 나이 들어감을 지켜보는 건 꽤 진귀하고 흥미로운 경험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시리즈물이 그것을 증명해냈고 말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그런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포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12년간 매일 촬영한 끝에 영화 <보이후드>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다가올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자였고, 그 순간이 왔을 때 정확히 무엇을 포착해야 하는지 아는 감독이었다.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는 결국 삶의 압축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테다.


단 6시간 동안 20년의 세월을 간접 체험한 우리는 사랑의 본질, 인생무상 같은 것을 느끼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셔틀버스를 타러 갔다. 영화제 측에서 심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을 위하여 셔틀버스를 운영해주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마음 놓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과 나는 15분 정도를 기다린 후 두 번째 셔틀버스를 타고 안전히 숙소에 돌아왔다. 짐 정리를 하고 잘 준비를 마치니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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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목표는 ‘잘 쉬고 오기’였다. 그러니 아침잠이 많은 나는 조금 늦잠을 잘 필요가 있었다. 전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다 새벽 5시에 잠들어서 이러나저러나 늦잠을 자기는 할 테고 말이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음날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침대에서 기지개를 피고 일어나려는데 영은 이제 막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날 산책을 하면서 봐둔 카페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오전 시간을 따로 보내는 건 부지런한 영과 게으른 나에게 익숙한 여행 풍경이었다.


우리는 오후 2시 영화를 볼 예정이었다. 무주 시내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는 오전부터 1시간 간격으로 운영되었다. 덕유산 일대에서 무주 시내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으므로 늦어도 12시 셔틀버스는 타야 했다. 우리의 목표는 12시에 셔틀버스를 타고 1시쯤 무주 시내에 도착하여 2시까지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획이란 것은 언제나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12시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11시 50분 정도 숙소를 나섰다. 영은 그때까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영과 중간 지점에서 만나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어째 멀리서부터 길게 늘어진 줄이 보였다. 아담한 셔틀버스에 과연 우리까지 다 탈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우리 앞에서 셔틀버스 자리가 다 차버린 것이다. 숙소에서 늑장을 부린 나의 게으름을 탓했다. 다음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선 1시까지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영화와 밥은 둘째 치고 뜨거운 땡볕 아래 10분도 더 기다릴 생각이 없던 우리는 곧바로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답은 택시밖에 없었다. 무주 시내로 가기 위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택시 값이었다. 영과 나는 택시에 돈 쓰기를 상당히 아까워하는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뒷줄에 서 있던 커플분과 함께 무주 시내로 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카카오택시를 부르니 몇 분 만에 기사님이 도착하셨다. 덜컹거리는 셔틀버스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건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엄청난 평안과 고요를 느낄 수 있었다. 기사님의 멋진 운전 실력 덕분일지도 모른다.


역시 돈은 너무 좋은 거라고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논밭이 보였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논들을 몇십 개 혹은 몇백 개를 지나쳐 드디어 무주 시내에 도착했다. 택시를 같이 탄 커플분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헤어졌다. 영과 나는 고등어를 먹으러 갔다. 현지인 바이브(vibe)가 물씬 느껴지는 분들로 가득한 걸 보아 이 일대의 맛집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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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너무 여유 있게 한 탓인지 우리는 영화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도착했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아까 택시를 같이 탄 커플분을 발견해 인사를 드렸다. 알고 보니 택시에 탄 네 사람은 나란히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볼 영화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베르히만 아일랜드>였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표까지 예매해놓고 친구와 급 막걸리 약속을 잡아 관람을 포기한 작품이었다. 덧붙여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작품은 이번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통해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만 그녀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영화는 실제 잉마르 베르히만이 살았던 포뢰섬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베르히만은 현대 예술영화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세계적인 거장 영화감독이다. 대표작으로는 <제7의 봉인> <페르소나> <화니와 알렉산더> 등이 있다. 포뢰섬은 1960년대 이후 베르히만 작품의 상당수가 촬영된 곳이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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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히만 아일랜드>는 관계의 미묘한 균형에 대해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베르히만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의 흔적을 부지런히 쫓아다닌다. 독특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주체적인 창작자로 거듭나면서부터 관객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뒤얽히고 무너지며 영화는 비현실의 세계로부터 점점 탈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 속의 현실과 현실 속의 영화가 절묘하게 맞닿아 재탄생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놀랍고 경이롭다. 두 세계의 일체화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어떻게 구체화 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본 영화는 다가오는 8월 4일에 개봉될 예정이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전날 <퍼스트 카우>를 보았던 무주청소년수련관에서 상영되었다. 다행히 어제만큼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영관에 사람이 꽉 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온기란 이토록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었다. 덕분에 바리바리 챙겨간 담요 2개는 방석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하루의 시작부터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났다는 것이 행복했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영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영화너무좋다진짜대박너무재밌지않았어?개봉하면또보러가야지 어쩌고저쩌고···. 나는 호들갑을 떨 때마다 너무와 진짜와 대박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포뢰섬의 여운을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다음 영화 상영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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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에 관람할 영화는 오기나미 나오코 감독의 <강변의 무코리타>였다. 해당 작품 역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쉽게 놓친 영화 중 하나였다. 오기나미 감독은 영화 <카모메 식당>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목부터 둥글둥글한 인상을 주는 그녀의 영화는 알게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구석이 있었다. 아주 보통의 이야기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낼 줄 아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오기나미 감독의 영화를 인상 깊게 본 건, 단순히 그의 영화가 선의와 온기로 가득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이질적으로 대비되는 삶의 양면성 – 예컨대 죽음과 헤어짐 같은 – 을 드러내는 데에도 감독은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오기나미의 영화에는 사연 있는 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그런 감독의 특색이 한층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오기나미 감독의 영화가 아름다운 건 결국 그 사연 있는 자들이 한데 모여 공동체적 연대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강변의 무코리타>에서는 가족 공동체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던 인물들이 이웃 지간 밥을 나눠먹고 욕실을 공유하고 밭을 경작하고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을 함께하며 대체 가족의 형태로 나아간다. 소박한 일상을 함께 일구어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오기나미 영화를 대표하는 상징체라 부를 만하다.

 

-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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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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