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3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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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

<경계 위에 선 존재>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없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일까. 손끝에 스치지도 못한 순간들을 뒤늦게 따라가기에는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 많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삶 속에서 나의 감정 하나 다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생의 목표로 향하는 길에서 어떻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기분이다. 그래서 종종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신념을 따를 수 있는 공간으로 떠나버리고 싶다. 그러니까, 나만의 유토피아를 세우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 즉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 수는 없기에 그저 단발적인 공상으로만 묻어두었다.


‘파저란트’, ‘나 여기 있으리…'에 이어 마지막으로 소개할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작품 ‘제국(Imperium)’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남태평양의 작은 섬으로의 여정을 떠나는 이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지키지 않고 원하는 대로 넘어 들 수 있는 소설이라는 세계 속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이 그대로 실현될 때, 나는 희열과 동경, 그리고 착각을 느낀다. 현실에 구현된 상상의 주인이 나라는 착각. 소설 속 인물의 유토피아와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다를지라도, 소설을 읽는 동안 내 상상의 섬에서는 유토피아가 새로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유토피아, 제국을 향하여


 

앞선 2개의 글에서 이야기했던 작품들과는 달리, ‘제국’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한다. ‘아우구스트 엥엘하르트(August Engelhardt)’는 1875년부터 1919년까지 이 세상에 실존했던 인물로 소설에서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행했던 시도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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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주의(Nudismus)’와 ‘야자열매주의(Kokovorismus)’. 이름만 듣고는 감히 그 의미를 추측하기도 어려운 이 두 가지 단어가 바로 엥엘하르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이념의 명칭은 꽤 직관적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뜻이다. 옷을 입지 않고 ‘자연’의 상태로 생활하는 ‘나체주의자’와 야자열매를 찬양하는 ‘야자열매주의자’로서의 엥엘하르트는 남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는 ‘카바콘 섬’을 사들이고 그곳에 농장을 짓기로 결심한다.


"고기를 요리하고 동물성 음식을 섭취하는 인간이 사람 고기를 먹는 식인종보다 더 진보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그것은 동물을 살해하는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그가 야자열매를 찬양하는 것에는 ‘신’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이 포함된다. 채식주의자로 묘사되는 그는 야자열매만이 불결하지 않은 음식물이라 생각하는데, 야자열매의 과육은 식량으로, 껍질은 섬유로, 기름은 화장품과 연료로 사용될 수 있다. 야자열매를 구성하는 각각의 모든 요소는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야자열매는 인간 머리의 형상을 띄고 있고, 인간은 신의 모습을 한 동물이다. 그렇기에 야자열매는 신의 ‘식물적 모방물’이다. 엥엘하르트는 이러한 일련의 연결고리와 더불어 그것의 특출난 활용성을 바탕으로 야자열매는 곧 ‘완전 물질’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이 완전 물질을 섭취함으로써 신과 동등해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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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하르트는 모래 위에 결정적인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것은 사실상 가장 뛰어난 야만을 향한 첫 발걸음이기도 했다."


오직 믿음만을 바탕으로 엥엘하르트는 카바콘 섬을 야자열매주의자들을 위한 공동체, 즉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카바콘 섬의 유일한 ‘백인’이 된 그는 섬의 원주민들에게 나체주의와 야자열매주의,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전파했는데, 섬의 원주민들을 시작으로 엥엘하르트만이 믿었던 이념들이 바다를 건너 그가 떠나온 독일까지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의 독일 전역에는 19세기 말 산업화로 인한 삶의 폐해를 개혁하겠다는 구호를 앞장세운 ‘생활개혁운동(Lebensreformbewegung)이 퍼져있었다.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은 엥엘하르트의 섬에서 실현될 수 있었고, 문명의 권태로 괴로워하던 지식인들 또한 그의 공동체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세상의 모든 장소에서 움트며 고개를 쳐드는 현대라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 같은 비신비주의자들이 진보라고 부르는 총체, 즉 문명 자체를 피해서 멀리 달아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답한 삶의 터전과 오염된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엥엘하르트와 뜻을 함께했던 많은 이들은 카바콘 섬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각자가 기대했던 유토피아와는 다른 모습 때문일까, 공동체의 설립자에 대한 실망 때문인 걸까. 문명에 대한 회의와 염증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했던 모든 사람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엥엘하르트마저 유토피아에 속에서 끝까지 존재하지 못했다.


‘제국’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엥엘하르트의 유토피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던 이유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카바콘 섬 원주민들이 엥엘하르트에게 동화되는 양상을 유심히 살펴보자.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엥엘하르트의 영향으로 독일 문학을 읽고, 독일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오랫동안 역사 시간에 배워 왔던 일제의 문화통치와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은가. 엥엘하르트가 자신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장소로 고른 카바 콘섬도 사실은 독일의 식민 지배 영토였다는 것까지 인지하게 되면, 유토피아를 직접 이룩한 엥엘하르트를 보며 느꼈던 희열과 동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단지 문명에서 멀어지기만을 바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엥엘하르트의 마음가짐도 계속되지 못했다.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동료에 극단적인 질투심을 느끼고, 반유대주의자가 되어버린다. 모두가 떠나버린 제국에 홀로 고립되어 엥엘하르트의 내면은 서서히 메말라가고, 내면이 변했기에 순수한 열망으로 만들었던 유토피아도 함께 황폐해진다.

 

엥엘하르트의 제국을 향한 여정 밑에는 독일의 식민제국주의와 인종주의가 바탕이 된다. 그가 저 멀리 떨어진 섬을 덜컥 구매할 수 있었던 것도, 원주민의 문화를 바꿀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권력을 등에 업은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새로운 유토피아, 제국으로 향하는 길은 기득권자의 오만으로 닦아진 것이었다.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크라흐트의 세 작품 속 주인공은 유토피아에서의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언급하였다.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서 다루었던 ‘파저란트’ 속 ‘나’는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현실에 대한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다. 또한 <경계 위에 선 존재>의 주제였던 ‘나 여기 있으리 …’ 속의 ‘나’는 민족의 정체성까지 버리고 좇았던 SSR의 몰락을 목도한다. 그렇다면 <제국>의 엥엘하르트의 결말은 어떠했는가?


당연하게도 모두가 떠나버린 제국에서 그는 행복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병에 걸리고, 그토록 경멸했던 육식을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먹는 행위를 통해 실천하게 된다. 그가 바랐던 이념이 현실화되었던 흔적은 이 세상에서 소멸하고, 그의 가장 첫 번째 목표였던 문명 탈피도 오랜 시간이 지나 카바콘 섬으로 온 군인들에 의해 부서진다. 미군이 주는 콜라와 핫도그를 먹으며 엥엘하르트는 그가 떠나왔던 문명, 동시에 더욱이 발전된 문명, 즉 새로운 제국으로 영원히 귀속된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미군은 수염과 머리칼이 무성하게 자란 그 노인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한 과달카날 섬의 대규모 군 기지로 데려가 구경을 시켜준다. … 사람들은 그에게 허리가 잘록하여 모양 좋은 유리병에 든, 달콤하고 맛난 흑갈색 액체를 마시라고 준다. … 사람들이 그의 머리와 수염을 가지런히 빗기고 티 없이 하얀 면 속옷을 머리 위로 입힌다. 손목시계를 선물해준다. 기운을 내라는 몸짓으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린다. 이것이 바로 제국이다."

 

***

 

단 한 명도 이른바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한 세 명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전하고자 한 걸까? 단순히 이 세상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크라흐트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파저란트’는 독일 팝 문학의 시초가 될 수도 있으며 저항 정신이 없는 수동적인 인물들의 쾌락적 생활양식을 단순히 묘사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다. ‘제국’ 또한 엥엘하르트의 모습이 히틀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이고 문명 혐오적이라는 평과 그러한 요소들이 오히려 전체주의와 나치를 비판하고 있다는 평이 공존한다.


문학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에 나는 그의 작품들이 분명히 사회 비판적이고 현대인들에게 고무적이라는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고 싶다. 개인의 혼란한 내면을 나열하고 있는 작품도, 가상의 역사적 배경을 가진 작품도, 식민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모두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허무와 우울은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현대인에게 그것들을 안겨준 사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가?


그의 작품을 읽고 세 편에 걸쳐 오피니언을 남기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말일 수 있겠지만, 세 개의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나의 대답을 작게라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복잡해진 생각만이 남아있다. 엥엘하르트처럼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글들을 쓴 까닭은 크라흐트가 ‘파저란트’, ‘나 여기 있으리 …’, ‘제국’ 통해 새로운 질문을 제시했듯이, 그의 독자로서 또 다른 담론을 이어 나가기 위함이다. 세 편의 오피니언을 읽고 크라흐트가 던진 질문들에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이라도 고민해보게 되었다면, 나는 나만의 목표를 이룬 셈이다. 그러니 그동안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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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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