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계 위에 선 존재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2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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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과거의 일들을 토대로 세워졌다. 모든 것은 역사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1919년 3월 1일에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또한 1945년 8월 15일에는 광복을 맞았다. 이 ‘사실’들은 절대불변의 역사이며 소설, 만화, 영화 같은 다양한 콘텐츠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도 어떠한 면에서는 역사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애매한 표현이 등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자.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스위스에서 스위스 소비에트 공화국(Swiss Soviet Republics, SRR)을 세우고 영국, 독일로 대변되는 파시즘 국가들과 SSR의 전쟁이 97년째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이 배경은 사실이 아니다. 기록이 증명하는 실제 역사와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 내에서는 귀족, 부르주아의 임시정부와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던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세계 공산주의 혁명 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실제 역사와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는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고 불린다. ‘대체 역사’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된다면’ 또는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면’과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만약’을 가정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나가는 문학 장르이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 소설이며, 그 역사적 사건이 실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판타지 소설이다.

 

 

 

거짓된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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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이제 아흔여섯 번째 해로 접어들었다. 여름의 원래 모습을 한 그런 여름이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언제였던가? 마지막 보름달이 있었던 때는? 그런 기억은 시간의 물살에 모두 씻겨 가버렸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의 백 년 동안을 끌어온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평화 시대의 삶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평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노파들이 자전거에 올라탄 채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쟁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10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인간이 지금껏 이룬 문명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읽고 쓰는 행위는 사치가 되어버려 기록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단 한 사람,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는 항상 조그만 수첩을 지니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읽힐 수 없는 글을 쓴다.

 

SSR의 장교인 ‘나’는 혁명위원회로부터 ‘브라친스키 대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미 도주한 브라친스키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주인공에 대한 강렬한 위화감을 조성한다. 군인들이 ‘나’를 향해 던지는 비웃음이나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우리 같은 이’ 따위의 표현들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SRR과 파시즘 국가 간의 전시 상황에서 군대가 아닌 또 다른 소속감을 주는 ‘우리’가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이 섣부른 판단은 나의 편견을 토대로 한다. 전쟁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모두 ‘백인’일 것이라는 편견. 내 안에 편견이 들어선 이유를 찾는 것이 그저 구차한 변명일지라도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전쟁 영화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흑인 주인공은 없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보이지 않는 벽을 존재 자체로 무너뜨린다.

 

‘나’가 SSR에서 장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SSR이 추구하는 가치 때문일 것이다. 인종 차별, 성차별과 같이 현재 우리 세상을 좀먹는 사상들은 이곳에서 떳떳할 수 없다.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힌 후에는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주민들을 해방시킨다. SSR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은 스위스인들과 평등한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SRR을 진심으로 동경했다. 그들처럼 말하고 싶었으며 그들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또한 그들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가치 아래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 ‘나’는 SSR의 군대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그 이상적 가치가 실현되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에게 SSR은 유토피아로 도달하게 해 줄 통로였으며 동시에 유토피아 그 자체였다.

 

이상에 다다르기 위해선 못 할 것이 없다. 그는 SSR의 군인이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견디고 민족과 가족, 아프리카 체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죽음에도 익숙해져야 함을 받아들인다. 브라친스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 사랑을 느꼈던 파브르가 폭발에 휩쓸렸을 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발아래 밟고 있는 땅이 지뢰밭일지라도 목표를 향한 전진을 멈출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SSR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도래할 유토피아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유토피아가 허상이었다면 ‘나’는 이제껏 무엇을 향해 달려온 것인가.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끈질긴 추적 끝에 알프스 요새 안의 브라친스키를 만난 ‘나’는 SSR의 진실을 마주한다. ‘나’가 믿었던 이상 세계는 모두 거짓이었다. 그가 받았던 스위스인과의 동등한 대우는 전쟁 무기를 길러내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뿐이다. SSR 덕분에 식민지적 착취 구조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식민 지배의 시작이었다.

 

“반혁명이니, 반공산주의니, 이단이니. 그런 건 전부 애들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당신은 스스로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지도원 동지, 당신은 사실 노예입니다. 알고 계시나요? 당신은 스위스의 노예라고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훈련받고 노예로 만들어진 거죠. 당신과 당신의 민족은 그냥 대포밥이예요. 로봇이라고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위조입니다.”

 

지속적이고 교묘한 세뇌. SSR이 내세운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는 ‘나’를 비롯한 ‘우리 같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다. 전쟁이 1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실재했던 백인과 흑인의 지배구조가 마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위스인이 되고자 했다.

 

“나는 전쟁조차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전쟁을 느낄 수 있었고, 전쟁을 맛보고,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SSR을 동경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세상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유토피아가 거짓으로 점철된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전쟁뿐이었다.

 

바라왔던 유토피아가 무너지고 삶의 목표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나’는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파저란트> 속 개인은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목적 없는 삶의 공허를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나’는 돌아간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고향으로, 스위스인이 아닌 아프리카 체와족으로. 이 귀향이 가능했던 이유는 ‘나’가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경계에 선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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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이 아닌 비(非)인간적 존재이며 그중에서도 ‘나’는 혼종적 존재이다. 어느 한 진영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여러 영역 안에서 동시에 서 있다.

 

브라친스키와 파브르는 신체에 코드를 지닌 사이보그 인간이다. 그들은 사실 결혼한 사이로 ‘나’가 파브르를 만나는 것부터 알프스 요새로 브라친스키를 찾아오는 것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들이 ‘나’를 만나 그에게 SSR의 실체를 일깨우고 같은 세력으로 힘을 키워나가고자 했다.

 

여기서 브라친스키가 상징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대표적인 표상 중 하나인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성적인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 ‘일깨운다’의 개념이 극단적으로 치우쳤을 때, 전자는 후자를 지배할 자격을 스스로 부여한다. 제국주의적 사고가 시작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식민 지배’라는 구체적인 방법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SSR에 대항하려는 브라친스키조차 휴머니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자가 소멸한 후, 브라친스키는 새로운 언어의 형태인 ‘연기 언어’를 개발한다. 무지의 세계에서 지식을 먼저 터득한 존재는 자연스럽게 권력을 얻고 다수를 지배한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폐해, 즉 SSR과 브라친스키가 멸망하는 순간이 온다. ‘나’를 설득하는 일에 실패한 브라친스키는 그의 심장을 칼로 찌른다. 하지만 죽지 않는 ‘나’를 확인한 브라친스키는 모든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자멸의 길로 빠지는 결말을 맞는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성을 포기하는 형벌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찔렀듯이, 극단적 휴머니즘 상징인 브라친스키가 자발적으로 이성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심장을 찔리고도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모든 인간의 심장은 왼쪽 가슴에 있지만, ‘나’는 비인간적 존재다. 그의 심장은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백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던 그는 확고하게 그어진 인종의 경계선을 넘었고, 이분법적 구분에서도 해방된다.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나’의 앞에선 무의미하다. 주체와 객체가 없으니 지배할 사람도, 지배당할 사람도 없다. 즉 ‘나’는 ‘탈식민지적’ 존재로서 극단적 휴머니즘의 맞서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떠오르는 미래의 시간을. 나는 그것들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문자로, 대지의 형태소로 하나하나 기록했다.”


SSR의 소멸 이후에도, 휴머니즘과 포스트 휴머니즘의 경계에 있는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자신의 혼종성을 받아들인다. 결국엔 고향으로 귀환하는 자아와 SSR 공화국 용병으로서의 자아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세뇌받았던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휴머니즘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난 존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국가의 종말을 경험해도 새로운 미래의 시간을 고대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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