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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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나라답게 독일 문학(Deutschsprachige Literatur)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위상을 자랑하고 있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 등,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의 문학을 총칭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토마스 만(Thomas Mann)',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등의 작가들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아 왔지만, 여기서 다루어 보고 싶은 작가는 크리스티안 크라흐트(Christian Kracht)이다.
앞서 언급했던 작가들에 비해 국내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1966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의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언론인의 신분으로 인도, 태국,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오랜 시간을 체류했는데, 이 경험은 앞으로 알아볼 그의 세 작품인 ‘파저란트(Faserland)’,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Ich werde hier sein, im Sonnenschein und im Schatten)’, ‘제국(Imperium)’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다채로운 해외 경험을 제외하고도 세 가지 작품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바로 등장인물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갈망은 모두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유토피아를 갈망했던 배경,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첫 번째 소설 파저란트(Faserland)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해보자면 ‘허무주의’, ‘소비주의’ ‘물신주의’ ‘나치즘’ 정도가 될 것이다. 여러 이데올로기 때문에 구조와 표현이 복잡한 소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파저란트는 화자 ‘나’가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경험한 주변인들과 환경에 대한 묘사를 담은 ‘여행기’이다. 여행의 사전적 정의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인 것을 고려하면, 쥘트 섬에서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린다우, 취리히까지 아무런 목적 없이 떠도는 화자의 여정에는 여행기보다 ‘방랑기’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소설의 제목 ‘파저란트’의 의미는 무엇인가?
독일어에 문외한인 사람도 ‘Land’를 통해 어딘가 존재하는 국가나 지명을 가리킬 것이라는 추측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발음은 다르지만, 영어와 똑같은 철자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Faserland’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제목의 해석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고, 그중에서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해석을 소개해 볼 것이다.
실과 섬유의 나라
‘Faserland’가 실, 섬유를 뜻하는 ‘Faser’와 나라를 뜻하는 ‘Land’로 이루어진 합성어라는 해석이며 작품 안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나치즘과 소비주의, 물신주의가 근거가 된다.
나치당과 히틀러의 ‘제3제국(Drittes Reich)’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약 45년이 지난 1990년대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 나치즘은 여전히 일상생활 속에 남아있다. 나치즘(Nazism)이 국가사회주의 (Nationalsozialism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모든 것은 ‘전체주의’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똑같은 제복을 입은 군대와 독일 아리아인으로만 이루어진 국가 설립이라는 목적하에 시행된 인종 청소, 개인의 가치는 전체에 종속될 때 존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간섭했던 강력한 국가 권력. 몇십 년이 흘렀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잔재는 화자의 시선과 행동 속에서 나타나고, 이것은 실과 섬유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큰 고민 없이 ‘옷’ 또는 ‘패션’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사람들과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인연들 사이에서 나를 각인시키는 수단,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이상적인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서 또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해 취향에 맞는 색과 원단, 스타일을 고심하고 또 고심한다. 이렇듯 오랜 시간 자기 표출의 욕구를 억눌러야 했던 개인들이 마침내 자유를 얻었을 때, 이는 소비주의로 이어졌을 것이다. 개인이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한 상품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직접 구매한 상품과 그것의 상표는 곧 한 개인의 정체성이다.
화자가 부유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상표를 마주한다. 친구 나이젤의 브랜드 로고가 박힌 티셔츠, 택시 운전사의 신발, 그들이 함께 피우는 담배와 화자의 셔츠는 모두 상표명으로 표현된다. 똑같은 나치 제복을 입어야만 했던 과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상표가 물밀듯 쏟아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이 있다. 바로 ‘바버(barbour)재킷’이다. 이것은 작품의 첫 시작에서부터 언급된다.
“그러니까 시작은 내가 쥘트 섬의 리스트에 있는 피쉬고쉬에 서서 예퍼 맥주를 병째 마시는 데서부터다. … 좀 춥고 서풍이 불어서, 안감을 넣은 바버 재킷을 걸친 채로 나는 마늘 소스를 얹은 새우 요리를 벌써 두 접시째 먹는 중이다.”
화자가 바버 재킷이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 담뱃불에 태워 버리고 난 후에도 결국 그에 대한 미련을 떠나버리지 못했는지 알렉산더의 바버 재킷을 훔쳐 달아나는 행동을 통해 화자는 여전히 바버 재킷을 지니게 된다.
“그 순간 에크슈타인의 문이 열리며 알렉산더가 들어온다. 그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마크가 붙은 아주 낡아빠진 녹색 바버 재킷을 입고 있고 … 전혀 오래 생각해보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는 바버 재킷을 집어서 몸에 걸친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마침내 그가 바버자켓을 내려놓았을 때는, 그 스스로 방랑을 마무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알렉산더의 바버 재킷을 호텔에 두고 온 게 생각난다. … 그 재킷을 가져오게 차를 돌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주 잠깐 생각해보지만, 기사가 여전히 이탈리어 풍의 듣기 좋은 스위스 독일어로 세금 신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냥 잠자코 있는다.”
도대체 바버 재킷이 무엇이길래,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도록 언급되고 화자는 그것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것일까.
바버 재킷이 의미하는 바는 나치 제복인데, 바버 재킷에서 나치 제복을 떠올리게 되는 인과관계는 ‘생김새’라는 매우 단순한 요소로 연결된다. 작품 속 만연히 노출되는 상표들은 전체주의를 벗어난 당시의 소비주의 문화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역사의 어두운 이면을 극복하지 못한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치 제복을 연상시키는 바버 재킷과 자기 표출 욕구의 실현을 위한 옷도 결국은 섬유일 뿐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조직이 유기되어 하나의 섬유를 생산하는 것처럼 국가라는 조직 안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개인은 자연스레 허무주의에 빠지고 허상의 세계를 꿈꾸게 되는 결과에 도달한다.
허무는 개인을 어디로 이끄는가
하지만 그 결과가 마지막이라는 법은 없다. 허무에 빠져 허우적대고,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를 바라만 보는 것이 결말이 되지 않도록 발버둥은 쳐볼 수 있다. 유토피아의 뜻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일지라도, 열심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와 비슷한 세상에라도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파저란트’ 속 등장인물들은 공허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닌, 회피하는 것을 택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티 속에서 마약에 취한 채로 현실을 외면하고,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운다.
또한 화자는 잘못된 역사와 그 역사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 반감을 품지만, 그 반감을 토대로 개선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고 또다시 회피할 뿐이다. 화자가 단편적으로 묘사하는 나치의 잔재를 읽다 보면 오히려 제삼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나치의 역사를 갖는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듯 말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부정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것 또한 결국 과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저 위 산속 호수에서 해주는 독일 이야기 말이다. 아마도 난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거대한 기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내 주의를 더 이상 끌지 못할 테니까.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한때 독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 그리고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로우리라”
그가 자유를 찾았을 때는, 바버 재킷을 포기했을 때와 일치하는데 이는 곧 죽음을 암시한다.
“나는 보트에 타고 나무판 위에 앉는다. 남자는 노를 그 쇠붙이 사이에 끼워 넣은 다음 노를 저어 나아간다. 곧 우리는 호수 한가운데에 당도할 것이다. 머지않아”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는 것이 아닌, 호수의 한가운데가 그의 목적지이다. 쥘트 섬에서부터 한없이 방황하기만 했던 화자가 처음으로 가진 목적지는 아무런 고통과 억압, 자유와 즐거움이 없는, 그래서 허무도 느끼지 못하는 암흑 속이었다.
작품 속에서 묘사된 그의 태도나 개인 삶의 몰락을 선택한 주변 인물들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죽음으로 나아가는 화자의 행동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결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공허를 느끼지만, 그 누구도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이 큰 음악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길 잃은 자아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한적한 바닷가에 앉아 여유를 즐길 때마저도 상대방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목적지 없는 발화의 연속이다.
일시적인 회피로는 해소되지 않아 점점 고여가는 허무의 늪이 결국 그들을 집어삼켰지만, 빠져나오지 못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적극적인 행동은 보여주지 못했어도 현실과의 고리를 차단하려는 모든 행위는 그들 나름의 발버둥이었을 지도 모른다.
파저란트 속 인물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존재하지만, 그들이 느꼈던 감정만은 우리 안에 실존한다. 넘쳐나는 정보와 끝없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현실 속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만의 공허를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헤엄쳐야만 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가라앉은 허무의 늪에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서로의 손을 다잡아야 한다. 몸이 반쯤 잠겼어도 아직 결말이 찾아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았으므로, 아직 늦지 않았다.
[김민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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