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늑대에게서 배운 것 - 철학자와 늑대 [도서]

글 입력 2022.05.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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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모시고 있어서일까. 동물들의 이야기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TV동물농장’, ‘주주클럽’ 같은 프로그램들을 즐겨 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다 보면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우연한 계기로 자연에서 낙오된 동물과 그들을 거두어 특별한 관계를 쌓은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볼 때면 늘 그랬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동물들을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항상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옳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한 번 낙오된 동물은 아무리 적응 훈련을 거친다고 한들 다음에도 도태 당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이러한 위험들을 감수하고 그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할까? 물론 혹자는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겐 그 말이 오히려 책임의 회피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렇게 자연의 섭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면, 방송에서 나온 인간과 동물의 기묘한 만남은 그저 작은 일탈에 불과한 걸까?

 

그런 의미에서 도서 <철학자와 늑대>는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 마크 롤렌즈가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아생 늑대와 10년 동안 동거동락하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인간과 늑대의 동거라니. 기본 소재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이 책은 그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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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말은 실존주의 알려진 철학 사조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쉽게 말해 태생부터 쓰임(본질)을 위해 만들어진 사물들과 달리, 인간의 탄생에는 특별한 이유가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물과 달리 존재의 이유, 목적, 규칙 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행위로써 실현한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이러한 생각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에 대해서는 존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말한 야생에서 우연히 만난 인간과 동물의 사연일 것이다. 일부 가축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은 자연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이것은 숭고한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은 감히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불문율이다. 그러나 책의 저자 마크 롤렌즈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자연의 의도부터 정의해 보자. 늑대에게 있어 자연의 의도는 무엇인가? 혹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의 의도는 또 무엇인가. 자연이 어떤 의미에서 ‘의도’라는 것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 p.61
 

 

우리가 보기에 자연은 선순환적 구조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짜인 일종의 시스템이다. 동물과 식물, 심지어 균류와 곤충 등에 이르기까지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각각의 존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령 초식동물은 식물을 먹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다. 이후 육식동물이 사망하면 그 사체는 균과 곤충 등의 먹이가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식물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생태계의 순환 구조’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늑대는 육식동물의 한 종에 불과하며,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늑대는 인간과 달리 본질이 실존에 우선하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역에 들어온 야생동물은 반드시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여기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한 사고방식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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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늑대의 입장은 어떠할까. 늑대가 생각하기에 자연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존이다. 늑대가 무리생활을 하는 것도,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기관을 가진 것도 모두 생존을 위해서다. 하다못해 번식기에 수컷이 암컷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것도 생존(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것)을 위해서다. 그렇기에 늑대에게 있어 자연의 의도는 본질이 아닌 ‘실존’이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자연의 법칙은 사실상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 동물은 자연에서 살아야 행복한다느니,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은 동물의 야생성을 망가뜨린다느니 이런 것들 모두 인간의 독단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연의 역사가 물려준 제약을 간단히 무시할 순 없다. 우리 속에 매일 갇혀 있는 늑대가 자연에 사는 늑대보다 항상 행복하고 충만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본질(자연의 법칙)이 그들의 실존을 고착시키거나 결정지을 수는 없다.

 

 
왜 오로지 인간만이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생명은 생물학적 유산에 속박되고 자연의 역사에 종속되어 살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닌 무엇이란 말인가? - p.63
 
 
개트윅 공항 근처 한 호텔의 비어 가든에 앉아 있는데 여우 한 마리가 다가왔다. 녀석은 마치 개처럼 1m도 채 안 되는 곳에서 음식물 부스러기라도 던져 주기를 기다리듯 얌전히 앉아 있었다……..이 여우를 타일러 보자. 너는 야생의 방식으로 쥐를 사냥해야 한다고…….우리는 여우를 그저 야생에서 쥐를 사냥하는 존재로만 격하시킨다. 여우의 지능과 풍부한 계략을 사르트르가 규정한 ‘존재’라는 제한적인 개념 속에 가둬 버리고 만다. 여우의 본질은 역사와 운명의 우여곡절 속에 계속 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여우란 무릇 이래야 한다는 여우의 존재도 변하는 것이다 - p.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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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주제는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영역을 넘어 꽤 다양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대중매체 속에서 이러한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게 슈퍼히어로 영화다. 영화 속 각각의 빌런들에겐 나름의 목적(본질)이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희생을 동반(실존을 위협)하는데 빌런들은 이러한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우리의 슈퍼히어로들은 이러한 희생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무고한 희생을 필요로 하는 숭고한 목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만약 이 영화를 1:1의 대결구도로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언맨과 타노스의 대결 구도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전투 중 인피니티 스톤이 모인 건틀렛을 얻은 타노스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필연적인 존재다 I am inevitable.” 이에 맞서 다시 건틀렛을 탈취한 아이언맨은 그 말을 조금 바꿔서 돌려준다. “나는 아이언맨이다 I am ironman.”

 

어떻게 보면 단순히 극적인 효과를 위해 넣은 대사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앞서 말한 실존과 본질의 문제가 담겨 있다. 우선 영화의 빌런인 타노스의 기본적인 신념은 우주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체들의 보다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그중 절반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동반되겠지만 그런 것쯤은 타노스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타노스는 생명을 개체가 아닌 ‘종’의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손가락을 튕긴다면 절반의 개체가 사라지겠지만 ‘종’ 자체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타노스의 입장에서 이 행위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그에게 절반의 희생이란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법칙이자 유일한 원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이야기한 ‘자연의 법칙’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그에 반해 여기에 대항하는 아이언맨(어벤져스)의 생각은 다르다. 우주의 균형이라느니, 종의 생존이라느니. 그런 건 모르겠고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라는 존재는 아이언맨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노스의 거대한 원리에 어벤져스는 소멸 당할지도 모르는 한 개체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으로써 맞서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절반은 지금 여기 실존하고 있으며,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간직한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실존과 본질의 문제는 현실의 영역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최근 뜨거운 화두에 오른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있다. 한 장애인 단체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출퇴근 시간에 벌인 시위는 시민들의 통근길을 방해하며 순식간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자 한 정당의 대표는 그들의 시위를 폭력 행위로 규정하며 당장 그만둘 것을 촉구했다. 이에 장애인 단체 역시 해당 정당이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개선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이를 지키지 않으려 한다며 즉각 반발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실존과 본질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선 출근길을 방해한 장애인 단체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편을 겪은 통근길의 시민들은 장애인들의 고충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극히 원론 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에서는 이 문제가 내포한 진짜 의미를 들여다 보기가 힘들다. 장애인들에게 이동권 문제는 지극히 실존적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동이 불편하다는 건 단순히 놀러가지 못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제한된 이동권은 곧 직업을 구하는 것은 물론, 하다못해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말하자면 장애인들에게 이동권은 단순한 불편이 아닌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물론 혹자는 자신은 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에 대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피해를 본 것이니 불만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장애인들 역시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몸이 불편해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에게 이 문제가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이며,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출퇴근길의 불편함이 장애인들에겐 일상과도 같은 일이다. 그렇기에 이를 출퇴근길의 불편함과 생존권의 대립으로 놓고 보게 되면 장애인들의 시위를 마냥 비난하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실존적인 접근이 늘 옳은 건 아니다. 때론 원리가, 본질이 더 우선해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이 두 가지를 언제나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는 곧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생각의 차이는 곧 행동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늑대에게 배웠다.’ 괜히 마크 롤렌즈가 이러한 말을 한 게 아니다. 결국 우리는 양자 간의 차이에서 늘 새로운 걸 배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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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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