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간을 돌리는 기다림이 건네는 위로 [영화]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그리는 '기다림'과 '기적' 같은 순간들
글 입력 2022.04.1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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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스포일러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보고 싶은 대상을 기다리는 설렘과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3시부터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네가 4시에 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 올지 모르는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 지치고 힘든 일이다.

 

세상엔 무수한 기다림이 있지만, 기다림의 종류를 둘로 나눈다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있는 기다림과,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끝을 알 수 있는 기다림은 설렘과 기대를 줄 수 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보통 행복하기보다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불안하고 지치게 된다. 심지어 12월 31일 서울의 어느 곳에 비가 오는 것 같은, 아주 가능성 낮은 일이 일어나야 끝날 수 있는 기다림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그리는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주인공 ‘영호’에게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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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순간으로 시간을 돌리는 기다림 : 비(雨)와 같은 과거가 주는 위안


 

보통 기다림이 설레는 이유는 기다림이 미래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림 끝에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만나게 될 미래를 생각하는 것으로, 기다림의 시간은 기대와 행복으로 물든다. 그러나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속 영호의 기다림은 영호를 어린 시절 위로가 되었던 기적의 순간으로 데려다 준다.

 

2003년의 영호는 노량진의 입시전문학원을 다니는 삼수생이다. 영호는 마음이 복잡하고 공부도 잘 되지 않던 어느 날, 어린 시절 한 여자아이와의 우연한 만남을 떠올린다.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던 어린 영호는 상처를 씻다가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여자아이와 마주친다. 자신은 청군이라 말하는 영호에게 그 여자아이는 쓰고 있던 백군 모자를 뒤집어 청색으로 바꿔 쓴 다음에 손수건을 다시 건네준다.

 

영호에게 그 만남은 잊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이었고, 여전히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기억이었다. 영호는 기억 속 그 여자아이에게 연락을 하기로 하고, 그렇게 ‘소연’의 집에 영호의 편지가 도착한다.

 

하지만 소연은 오랜 지병으로 입원해 있었고, 편지도 직접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연의 말을 그대로 전할 수 없었던 소연의 동생 ‘소희’는 언니의 이름으로 영호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편지는 그 자체로 기다림을 전제하는 매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은 영호를 과거의 순간으로 데려다 주었고, 그 시간 동안 영호는 설레기도, 위안을 받기도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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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별 같고, 그 친구는 비 같아."

"그게 뭔데?"

"넌 눈부시고 그 친구는 위안을 줘"

“뭐, 내 별에서는 비가 안 내릴 것 같아서 위안이 안 되냐?”

 

 

학원을 함께 다니며 영호와 우연히 마주친 후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수진'은 편지를 주고 받는 ‘그 친구’와 자신의 차이를 묻고, 영호는 수진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이 대사 속 영호가 말하는 '별'과 '비'의 차이는 어쩌면 각각이 연상시키는 시점의 차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은 주로 목표로 하는 지향점이나 목표를 연상시키며, 현실적인 꿈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반면 비는 주로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해주는 매개가 된다. 영호가 비로부터, 소영 혹은 소희의 편지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과거의 추억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눈부신 꿈이나 목표보다 과거에 마주했던 행복했던 순간들로 힘든 현실을 피해 도망가기도 하고, 이러한 순간들에 위안을 얻는다. 그 순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스스로에게는 기적 같은 순간들이다.

 

영화 속에서 영호가 편지를 기다리고, 비 오는 12월 31일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러한 기적 같은 순간들로 영호를 잠시나마 데려다 줬다. 그렇기에 그 끝과 상관없이 영호의 기다림 자체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의미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그저 작은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종종 우리를 스쳤던 희망, 꿈, 사랑, 그리고 낡고 오래된 것들,

그렇게 떠나 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미래를 향하는 기다림이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 기다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영화도 2003년과 2011년을 오가며 우리 역시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이미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자꾸만 돌아보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어 나아가지 못한다면 뒤처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스쳐갔던 기적의 순간들에 기대 살아간다. 만약 기다림으로 그 순간에 닿을 수 있다면, 그 기다림은 어쩌면 그 자체로 위안이 되거나 견딜 만한 것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들 역시 우리가 마주했던 기적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사에 오롯이 새겨지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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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이제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가끔은 억울한 생각도 들어.

내 20대 시절이 온통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가득했으니 말이야.

난 지금 우산장수가 됐어. 생각해보면 내 20대는 우산과 비슷한 것 같아.

매번 잃어버리고 녹슬고 끊어지고 없어지고, 생긴 것도 마냥 똑같고.

그래도 잊지 못할 시절이었어. 고마웠어, 정말 정말. 만나면 할 얘기가 많았는데,

끝내 만나지 못한다. 보고싶은 나의 친구 안녕."

 

 

그러니 비록 기다림의 시간이 단지 이미 떠나버린 것을 붙잡지 못하는 아쉬움일 뿐이라 하더라도,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모두가 그 시간을 충분히 아끼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런 누군가의 기다림 역시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여유와 관용, 어쩌면 조금의 낭만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바라본다.

 

 

 

기적이 되어준 '너'에게 : 우리 곁을 스쳐간 기적


 

영화에서 수진은 영호에게 ‘운명’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필 같은 재수학원에서 두 번이나 같이 공부하게 된 것도, 우연히 계속 마주치는 것도, 함께 바다를 가게 된 것도, 운명 같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한다.

 

수진의 말처럼 영화도 뚜렷한 인과가 있기보다 여러 사건들이 운명처럼 이어진다. 왜 수진이 영호와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운명이라 느꼈는지, 영호가 왜 갑자기 공부를 그만두고 우산 만드는 법을 배우러 떠났는지, 소희는 왜 영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부치지 못하고 영호의 편지들도 나중에야 열어보았는지, 친구가 없다는 염세주의자 ‘북웜’은 어떻게 소영을 마지막까지 지켜봐 준 사람이 되었는지, 어렴풋이 미루어 짐작해 볼 순 있지만 명확한 이유를 따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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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운명적인 순간들은 오히려 우리 삶의 면면과 닮아 있다. 우리도 때론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들에서 운명을 느끼고, 마음 속 아주 작은 목소리에 이끌려 큰 결정을 하기도 한다. 또 때론 이유 없는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 받기도 한다. 그런 순간들은 운명처럼 다가오며, 오래 기억되는 기적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기적의 순간들을 마주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각각의 '우리'다. 실제로 영화에서 영호의 이름이 흔하다는 언급이 자주 나오고, 자신의 이름을 아냐고 묻는 수진에게도 영호는 ‘나만큼이나 흔한 이름’이라고 답한다. 이를 통해 영화가 그리는 이야기가 특별한 사람들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는 우리 곁의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준다.

 

흔하고 특별할 것 없이 느껴지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기적 같은 순간 속에서는 선명한 색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 기적은 수진의 말대로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함께 있는 것 자체일 수 있고, 소희가 편지를 통해 ‘하늘을 보는 마술’을 부리거나 바다의 소리를 전했던 것, 영호가 어린 시절 받았던 작은 친절일 수 있다.

 

이렇게 기적의 순간들은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자주 그 순간들이 이미 스쳐간 다음에야 그것을 알아채기도 한다.


 

"이 거리를 걸을 때면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내 삶의 기적은 이미 지나쳐 간 건 아닌지.

혹은 나 따위에겐 그런 영광은 끝내 오지 않는 건지.

그리고 또 생각해 본다.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기적이 될 수 있을지.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 누군가의 기적 속 일부일 수 있고,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기적 같은 순간일 수 있다. 그러니 만약 다음이 있다면, 그 기적을 조금 더 빨리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게도, 누군가에게도 ‘기적’의 순간을 만들어 주었던 당신 앞에, 마음을 담아 영화 속 수진이 했던 나레이션을 놓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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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이 우주에 아무것도 없었던 때가 있었겠지?

별도 바람도 구름도 이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너와 내가 스치고 알아가고,

웃고 울고 이 우주에는 또 어떤 기적으로 넘쳐날까? (..)

너에게 많은 기적이 번져 갔으면 해.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적.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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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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