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돌아온 KBS 개그 프로그램, '개승자들' [예능]

글 입력 2022.03.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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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의 추억, 개그콘서트



스티브 원더의 Part Time Love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커다란 ‘GAG’ 간판을 뒤로 한 출연진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 앞으로는 흰색 연기가 솟아오른다. 카메라는 정신없이 돌아가며 이태선밴드를 비추고, 곧이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에게는’라는 멘트가 나온다. 이어지는 합주를 배경음악으로 탐나는 상품권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무시무시한 탈력감이 찾아온다. 이른바 '월요병'이다. 


1999년 9월 4일에 방송을 시작한 개그콘서트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개그콘서트에 나온 유행어는 얼마 안 가 광고 문구로 차용됐고, 사용된 소품이 금방 시장에 나왔으며, 매주 드라마나 영화, 음반 등을 홍보하러 나온 유명연예인들을 볼 수 있었다.


일요일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 개콘을 보는 건 우리 집의 당연한 일과였다. 일고여덟시쯤 저녁 식사를 하고, 엄마가 깎아주신 과일 등 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면, 텔레비전 화면 오른쪽 상단에 개콘 로고가 떴다. 그러면 나는 소파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한 시간 반 동안 열심히 웃을 준비를 했다. 엄마도 그때만큼은 얼른 들어가서 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밤 9시 15분이라는 편성시간은 늦잠 자기를 좋아하던 초등학생에게 취침시간을 미룰 수 있는 정당한 핑계였으므로.


만담과 시트콤, 스탠딩 개그의 성격이 적절히 섞인 개그들은 시청자에게 빠르고 즉각적인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시청자의 피드백을 적극 수용해 없어진 코너가 있는가하면, 인기가 많아 뒤로 미뤄지거나 덩치가 커진 코너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보면 오랫동안 <개그콘서트>의 엔딩 코너 자리를 지켜온 '봉숭아 학당'이 나왔다. 출연자들은 각자의 유행어나 개인기를 선보였고, 그 사람들이 하는 양을 정신없이 구경하다보면 그 당시 존재감이 큰 개그맨이 나와 코너를 마무리지었다. 이태선밴드가 연주하는 엔딩곡이 끝나면, 이제 정말로 침대에 누워야 할 시간이다. 개콘으로 '월요병'을 톡톡히 실감한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 친구들과 전날 본 개콘 속 장면이나 유행어들을 따라하며 열심히 떠들고는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개그 프로그램 얘기를 하지 않게 됐다. 개콘의 오랜 애청자이던 우리 집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그콘서트>할 시간이라며 정해진 듯 KBS를 틀던 우리는 이제 일요일 밤마다 리모컨을 쥐고서 수많은 채널들을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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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는 왜 사라졌는가


 

“손발 다 묶어놓고 어떻게 웃기라고”라는 박성광의 말처럼 <개그콘서트>에 출연하는 코미디언들은 공영방송의 엄격한 규제 안에서 사람들을 웃겨야 했다. 풍자 개그를 앞세웠던 <개그콘서트>였지만,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검열이 덜한 인터넷과 수위 높은 해외 코미디의 파급력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결국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며 뻔해진 개그는 사람들로부터 ‘노잼’이라는 반응을 끌어냈다. 

 

반대로 기준을 도통 알 수 없는 ‘표현의 자유’로 욕을 먹기도 했다. 정치적 편향성을 띠고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고, 외모 비하나 장애인 희화화, 인종차별을 일삼는 개그가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철 지난 개그'들은 시청자들을 붙잡아두지 못했다. 특정 대상이나 집단을 조롱하는 것으로 유머 코드를 만들어내던 개그콘서트의 방식이 더 이상 사람들을 웃기지 못한 것이다. OTT 서비스와 유튜브, 각종 인터넷 방송들이 영상 매체의 주류가 된 것 또한 시청률의 하락세에 한몫했다. 코로나19 사태 후에는 무관객으로 사전 녹화를 진행하며, 공개 코미디라는 이름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웃기고, 웃는 것으로 소통해야 하는 코미디의 경우 무관중, 비대면 상황이 시청자 유입에 더욱 치명적이었을 테다.


결국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물던 개그콘서트는 2020년 5월 14일 잠정 휴식기를 갖겠다고 발표했고, 결국 2020년 6월 26일 1050회를 마지막으로 종영하게 된다. 21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에 동요했다. 그 무렵 개콘을 잘 챙겨 보지 않았던 나 역시 소식을 접한 후에 한동안 싱숭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농담 삼아 말하는 ‘개콘이 망한 이유’ 같은 말에 웃지 못할 때마다, 내가 아직 개콘을 보며 웃어온 시간과 해소한 슬픔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콘의 폐지가 무거웠던 이유는 이제는 유일해진 코미디 빅리그와 함께 몇 안 되는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이다. 인기 코너와 스타들을 숱하게 배출했던 개콘이지만, 대부분의 코미디언들은 예능 MC나 패널로 자리를 옮겨갔다. 패러디나 밈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쉽게 생산 됐고, 웃음을 주는 건 운동선수나 아이돌, 모델 등 예능에 출연하는 모든 이들의 역할이 됐다.

 

무엇보다 <개그콘서트>는 코미디 빅리그와 함께 얼마 남지 않는 공개 개그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코미디언들은 예능 MC나 패널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고, 웃음을 주는 일 또한 예능에 출연하는 운동선수, 아이돌, 모델 등의 역할이 되어있었다. 개콘의 종영은 단순히 한 프로그램의 끝이 아니었다. 개콘은 전성기 시절 30%대의 시청률이 나오던 장수 프로그램으로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공채 개그맨' 제도로 계속해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오던 개콘이 폐지한다는 건, 곧 전문 희극인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뜻이었다.


 

 

KBS 개그 프로그램의 부활 <개승자>


 

지난해 11월, 개그콘서트가 폐지된 지 약 1년 반만에 KBS는 새로운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개콘의 후속작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개그’와 ‘계승자’를 합친 말이자, ‘개그로 승부하는 자들’을 줄인 <개승자>는 경연 프로그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진행 방식은 토너먼트로, KBS 소속 코미디언으로 구성된 13팀이 승부를 벌여, 1억 원의 상금을 받을 우승 팀을 가린다.

 

5%라는 시청률을 기록한 첫 방송은 한국 코미디의 현주소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개그콘서트> 부활이라는 희망적인 미래를 점쳐보게 한 팀이 있었는가 하면, 기존의 아이디어를 재탕해 경연 프로그램에 선보이기는 안일한 무대라는 생각을 갖게 한 팀도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건 요즘 트렌드를 적극 수용한 신인 팀과 이승윤 팀이었다. 신인 팀은 코로나 19 이후 보편화된 Zoom 회의를 소재로 삼아 '회의 줌 하자'라는 코너를 만들었고, 이승윤 팀은 유튜브 전성시대의 알고리즘을 활용해 '신비한 알고리즘의 세계'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두 팀 모두 각 플랫폼의 특성을 활용해 빠르게 치고 빠지는 개그로 판정단에게 즉각적인 웃음을 주었고,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변기수 팀과 김원효 팀은 팀장들이 각각 허세 넘치는 래퍼와 개념 없고 뻔뻔한 검사라는 중심인물을 맡아 특유의 입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에 반해 박준형 팀과 유민상 팀 그리고 김민경 팀은 <개그콘서트>의 기존 코너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개그로 식상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KBS 공개 코미디를 살리자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였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개그 판정단의 투표에 따라 방송이 진행될 수록 많은 팀들이 탈락했다. 살아남은 팀들은 관객에게 받은 평가를 바탕으로 코너를 새롭게 짜오거나, 기존의 코너를 개선하며 웃긴 무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방송 내내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관객과 교감할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했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온라인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하던 문화예술 업계 역시 많은 공연들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게 됐다. 온라인 공간의 특색을 살려 새로운 연출을 시도하거나, 보다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게 하는 등 새로운 창구로서의 장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대안이 될 수는 없었기에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1화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개승자>에 나온 출연자 중 상당수는 설 자리가 없어, 개그를 그만둔 상태였다. ‘피식대학’이나 ‘강유미 좋아서하는채널’처럼 유튜브로 나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코미디언들이 훨씬 많았다. 

 

<개승자>는 각 팀의 무대가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내고, 또 연습했는지 준비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무대 위 코미디언들은 즉흥적으로 재치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웃음을 터트리기 위해 무대 뒤에서 치밀한 계산을 해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공개 코미디의 특성상 같은 소재를 반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코미디언들은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또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게 올린 한 편의 무대 위에는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월 12일, 4개월 간의 방송 끝에 <개승자>가 종영했다. 파이널 4차전에 등장한 여섯 팀들은 어느 때보다 비장한 각오로 개그에 임했다. 이승윤 팀과 변기수 팀은 첫 방송 때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신비한 알고리즘의 세계’, ‘힙쟁이’를 올렸고, 김준호 팀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에도 좀비를 이용한 익살스러운 개그를 했다 . 이수근 팀은 이전에 했던 개그를 압축한 <게임의 법칙>이라는 코너로 객석과 함께 무대를 꾸며나갔고, 김원효 팀은 콩트 개그에 놀라운 반전을 섞은 <우리 A.I가 달라졌어요>를 선보였다.

 

그리고 윤형빈 팀은 정인의 '오르막길'로 지난 4개월 동안의 여정을 녹여낸 감동적인 코너를 만들었다. 개그 요소는 많지 않았지만, 코미디언들이 이 프로그램에 어떤 태도로 임했는지 지켜본 시청자로서 뭉클해지는 무대였다. 현장 투표와 온라인 투표, 문자 투표를 합산해 선정된 대망의 1위는 이승윤 팀이었다. 이승윤 팀은 팀원 홍나영이 제시한 알고리즘 아이디어를 필두로, 최신 유행 밈을 적극 수용해 무대를 꾸려왔다. 1라운드부터 파이널까지 높은 표를 받았기에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과기는 했지만, 출연진들 간의 사전투표에서 가장 먼저 탈락할 것 같은 팀으로 뽑혔던 팀이기에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1위는 비록 한 팀이지만,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13팀 모두가 개그콘서트 폐지 이후 전망이 불투명해진 한국 코미디를 살리겠다는 태도로 임했음은 틀림없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오랜만에 개그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웃을 수 있어 기뻤다. 비슷한 프로그램, 비슷한 출연진으로 무얼 봐도 식상하게 느껴지던 요즈음 TV에 잘 나오지 않던 원로 코미디언들과 몰랐던 신인들을 발견한 것 또한 반갑다.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조금 전 본 얼굴들이 나올 때면 개그콘서트가 갖고 있던 신인 등용의 문이라는 역할을 되새기게 된다.


팀장 이승윤은 "개그 프로그램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승 소감을 들으며 새삼 그동안 코미디언들에게 코미디언으로 설 수 있는 무대가 정말 적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전통 개그가 시대에 뒤처졌다는 평을 내리기보다, 이를 어떻게 하면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싶다. 그 시도의 일환이었던 <개승자>는 평균 3.8%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낮은 것 같으면서도, 낮지 않은 숫자를 보며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이 다시 전성기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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