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실패를 남겼다 [영화]

영화 <더 디그>를 발굴하다
글 입력 2022.01.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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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은 왜 모든 것을 바꿔 놓을까. 느리지만 아주 강력한 이 힘은 어째서 눈앞의 풍경을 항상 송두리째 앗아가는 걸까. 시간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인간은 언제나 무력해진다. 현재를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노력하지만, 그럴 때마다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이 야속한 흐름에 우리는 언제나 실패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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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오늘 소개할 <더 디그>도 이런 시간의 힘에 관한 영화다. 시간에 맞설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과거의 한순간을 현재로 복원하려는 인물들을 그린, 그런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시절, 어느 부유한 미망인 ‘이디스(캐리 멀리건)’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배질 브라운(레이프 파인즈)’을 고용해 자신의 땅에 있는 무덤들을 발굴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이룬 그들.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는 영국에서, 머나먼 과거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출처: 왓챠피디아 <더 디그> 영화 소개)

 


무덤, 부장물 그리고 앵글로 색슨의 배. 여기 누군가의 삶이 있다. 아니 있었다. 과거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전쟁의 먹구름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


그런데도 이디스와 아마추어 고고학자 브라운은 땅을 판다. ‘미래를 위한 일’, ‘후대와 선대를 잇는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유적에 숨을 불어넣는다. 이것은 과거가 현재의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며,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밝히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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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과거의 시간이 도래하고, 그들의 삶은 죽음 너머로 이어진다. 복원하고 붙잡으려는 모두의 시도에 힘입어, 앵글로 색슨의 배는 천 년만의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자신마저 지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디스 부인, 학교를 나오지 않은 아마추어 학자인 탓에 발굴 업적을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브라운, 똑똑하고 유능한 고고학자이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 묘한 엇나감을 느끼는 페기(릴리 브라운)까지.


영화는 역사라는 거대 서사의 비밀을 파헤치면서도, 오히려 거대 서사와 거리가 먼 이들에게 그 진실을 탐구할 기회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진실이 지금껏 역사학에서 암흑시기라고 일컬었던 ‘6세기 앵글로 색슨 문명’에 관한 점이었다는 사실은, 조명받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에 의한 새로운 역사 쓰기’라는 영화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 일렁이는 시기를 배경으로, 주류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변두리에 있는 이들의 치열한 삶은 저절로 영화의 서사를 부여한다. 자신이 죽고 홀로 남을 아들 로버트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이디스, 공군에 소집되어 전쟁에 나가야 하는 로리(자니 플리)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페기, 그 둘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체임벌린 총리의 연설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슴슴할 정도로 잔잔하게 전개됐던 이야기의 감정이 고조되며, 이때 등장하는 이디스와 아들 로버트의 대화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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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보여요. 어머니 우주를 항해하는 거예요.

 

이디스: 응, 목적지는 어디야?

 

로버트: 오리온의 허리띠요. 왕비를 고향으로 모시는 거예요.

 

이디스: 어떤 왕비?

 

로버트: 이 배의 주인요, 긴 항해를 한다고 백성들이 보물을 잔뜩 실어줬어요. 배가 도착했을 때 왕비는 슬펐어요. 모두를 남겨두고 떠나는 길이라는 걸 알았거든요. (중략)......우주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요. 500년이 순식간에 지나가죠. 왕비가 지구를 내려다봤을 때 어른이 된 왕비의 아들은 우주비행사가 돼 있었어요. 왕비는 알고 있었죠. 아들이 첫 우주여행을 하는 날, 다시 만나게 되리란 걸요.

 

 

사학과를 다니며 전공에 대한 회의감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 역사라는 일을 평생 업으로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던 때였다. 그런 필자에게 <더 디그>는 망치처럼 다가왔다.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브라운이 이디스가 임박한 죽음 앞에 괴로워하자 건네는 말,

 

 

‘우리는 태초부터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죠. 완전히 죽는 것은 아니에요.’

 

 

이 대사는 마음에서 수도 없이 재생됐다.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그래서 내 안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는 어떤 비밀을 발견하는 일. 누구도 다정한 손길을 주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흙이 덮인 작은 비밀을 알게 되는 일. 그 비밀에 묻은 티끌을 떼어내고, 애정이 담긴 사진을 찍는 일. 자신을 믿고, 비밀이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 꼭 붙잡아야 하는 일. 비록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일어나 돌아가고 싶을 일.


그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는 생각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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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로리는 페기에게 마치 감독이 관객에게 묻듯, 영화를 관통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천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면 우리는 뭘 남길까요?'

 

 
영화를 다 본 후 떠오른 대답.


아마도 우리는 실패를 남길 거다. 폐건물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별이 쏟아지는 봉분 위에 누운 모자처럼, 우리는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다신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오롯이 전유한 채 마음에 새기겠지.


그 기억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길 바란다. 서퍽 서튼 후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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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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