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길 위의 청춘: 프란시스 하 [영화]

글 입력 2021.11.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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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운로드 목록을 뒤적이고 있었다. 몇 년 전 저장해 두었던 영화 하나가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86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 그리 친숙하지만은 않은 흑백 영화, <프란시스 하>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만났던 그때, 나는 재생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시정지를 눌러버렸고, 그것 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 화면을 덮어버렸다. 어쩐지 서툴고, 투박하기까지 해 보이는 이 현실감이 극악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던 그 밤을 채우기 위해 <프란시스 하>의 재생 버튼을 다시 한번 더 눌러보았고, 그제서야 <프란시스 하>가 어떤 사람들의 인생 영화로 언급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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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 우정



<프란시스 하>는 친구 소피와 함께 뉴욕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용 견습생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도 없는 단짝 소피와 사소하지만 충분히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프란시스는 애인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와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


프란시스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여자 주인공을 사랑에 빠뜨려 허우적대게 만들거나, 반대로 성장의 토대가 되는 '전남친'이 아니었다. 소피는 프란시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부로 설정되었다.

 

둘은 함께 있는 순간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어린아이가 되어 짓궂은 농담과 장난을 치며 온통 흑백인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니 분명 언젠가 함께 험담을 했던 친구 '리사'와 함께 다른 집을 구해 살게 되고, 친구보다는 애인을 더 챙기는 소피에게 유치하게 굴 수밖에 없었던 프란시스의 행동도 이해가 간다.


늘 제자리를 지켜줄 것만 같았던 것들이 떠나고 나서야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세상은 모른 척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은 간사한 마음 따위 전혀 기다려 주지 않고 어른이 되길 종용한다.

 

소피와 멀어지고 마치 소피의 자리를 대체할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 사이를 전전하는 프란시스는 어쩐지 이전만큼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주눅 들지 않기 위해 꾸며진 말을 하고 과장된 행동을 하며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고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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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서로의 호감을 쉽게 눈치채잖아요. 하지만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고 웃고 있는 상황에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러운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꿈과 일이 얼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순간 소피와 은밀히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달라진 각자의 삶 속에서도 언젠가 함께 만들어갔던 둘 만 아는 세계를 서로의 눈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서 그 모든 현실이 비록 영화 초반, 거창하게 떠들던 두 사람의 원대한 미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눈동자 속의 비밀스러운 세계는 원하는 한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길 위의 프란시스



무용가의 꿈을 꾸고 있지만 현실은 견습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프란시스는 지지부진한 현실과 커다란 꿈 사이의 괴리 속에서 분투한다. 또 늘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프란시스는 러닝 타임 내내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일과 사랑과 관계가 격동적으로 변하는 순간 딱히 발 디딜 곳 없이 움직이던 프란시스는 별안간 파리로 이틀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빚까지 져가며 즉흥적으로 당도한 프랑스에서조차 기대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도 못한다. 시차 때문에 늦은 오후까지 늦잠을 자고, 파리에 산다던 친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야 겨우 연락이 닿는다. 하필 그렇게 무리해서 돌아와 듣게 된 소식도 원한 적 없는 잡 오퍼뿐이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프란시스의 삶은 어느 대도시를 전전하는 청춘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어떤 사람은 경험해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막연히 꿈만 꿔본 도시에서의 삶이 차가운 흑백 영화 속에서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비친다.

 

 

프란시스 우리는 세계를 접수할 거야.


넌 출판계에서 먹어주는 거물이 되고


넌 완전 유명한 현대무용수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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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도시를 힘차게 뜀박질하며 가로지르는 프란시스의 모습이 인상 깊은 것은 아마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회색빛의 얼굴로 앞 만 보며 걷고 있는 가운데 활짝 웃는 표정으로 춤을 추며 달려 나가는 프란시스의 모습은 머무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 여행하는 자의 것과 같아 보인다.

 

프란시스가 외롭고, 차가운 그 도시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곳에는 닿지 못할지라도 다디단 꿈이 있고, 잠시 복잡하게 꼬일지라도 소중한 인연이 존재한다. 불완전하더라도 부족함은 없고, 그거면 충분한 젊음이 있다.


바람처럼 휘청이며 흘러가던 프란시스는 자신의 삶으로 떠나는 소피의 뒤를 쫓다 문득 자신의 맨발을 발견한다. 더 이상 좇을 수 없는 이상이란 특별한 줄로만 알았던 내 삶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도 결국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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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떤 지점을 성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현실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만이, 세상 누구도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평생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성장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결국 마치 프란시스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것만 같은 멋진 공연을 완성하고, 그토록 원하던 운명 같은 우정도 확인하며, 그 척박해 보이기만 했던 도시 가운데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프란시스가 전과 다른 생기로 삶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단지 그걸로 충분하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불완전하더라도 부족함은 없이,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젊음과 함께하는 20대를 만끽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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