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예와 예술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 공예 트렌드 페어

공예는 쓸모 있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글 입력 2021.11.3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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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6회를 맞이한 공예 트렌드 페어가 11월 19일부터 11월 21일까지 코엑스 C홀에서 총 3일간 진행되었다.

 

공예 트렌드 페어가 이틀째 열리는 20일날 코엑스 C홀을 찾았는데, 3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관객들에게 개방되어서 그런지 인파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코엑스 C홀이 위치한 3층으로 들어서자마자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보였고 표를 수령하기 위해 대기중인 사람들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코로나 시대 이후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처음 봤기에 내심 반가웠던 한편, 입장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줄이 긴 것과는 별개로 전시관에 들어가는 사람들 역시 많았기 때문인지 입장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관리자분께 입장권을 보여드리고 들어간 C홀은 굉장히 넓었다. 그 길었던 줄이 빠르게 줄어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구경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넓었기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관람 방향이라던가 전시 안내표 같은 것이 팜플렛에 소개되었더라면 조금 더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관람객의 활동 반경을 지정하지 않았던 것이 다양한 공예인들을 발굴해내겠다는 공예 트렌드 페어의 비전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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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전시회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공예 작품이라 함은 도자기나 식기, 가구, 기타 악세서리만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공예'라는 말이 담고 있는 뉘앙스가 그렇게 느껴져서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예상했던 작품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2021 공예 트렌드 페어에 등장한 전시 품목들은 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들이 많았다.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봐도 좋을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거대한 예술 전시회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그때부터 가슴이 굉장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공예(工藝)의 사전적 의미는 '실용적인 물건에 장식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높이려 하는 미술'이다. 내가 알고 있던 공예의 의미는 좁은 의미에서의 공예였다. '실용적인 물건'까지만 해당하는 의미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 날 느끼고 온 공예 작품들로 인해 공예의 적용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 사전에 정의된 범위 그 이상으로 말이다.

 

어쩌면 실용적인 물건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행동'이나 '시도' 또한 공예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예술 작품이 사각형의 캔버스 액자로 한정되었다면 현재는 액션 페인팅이나 해체주의도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아래 사진을 보며 공예의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공예 : 색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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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평범한 도자에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들을 붙여 새로운 모습의 도자를 발견하고자 한 작품이다. 어쩌면 사전적 공예 의미에 가장 잘 들어맞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역사책이나 미술책에서 보는 그런 도자가 아닌, 장식적 가치를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덧붙여 새하얀 도자에 색을 입혀주었으니 말이다.

 

색을 추가한다는 건,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물체에 개성을 넣어주는 셈이니 말이다. 흔히 무채색이라 여겨지는 흰색, 검은색, 회색은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어디에나 어울리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다. 색은, 특별하지 않은 것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오묘한 힘이 있다.

 

비슷한 예로 이런 것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취미라 하면 '음악 듣기'를 흔히 떠올릴 수 있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음악 듣기는 더이상 취미라고 부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의 취미는 취미라고 부를 자격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음악 듣기를 나만의 것으로 확실히 소개하기 위해선 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앞에 붙어야 한다. 팝송 듣기, 클래식 듣기, 일렉 음악 듣기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장르'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색'이 된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색의 매력이다.

 

 

 

공예 - 예술 :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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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원 작가는 시계에 메시지를 담아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언뜻보면 시계라고 생각하기 힘든 엄재원 작가의 위 작품은 '우리 사회 약자를 향한 추악한 범죄들이 끝나지 않은 채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계의 둥근 모습이 끝없이 순환하는 무한과도 같다는 것에서 착안한 위 작품은 시계라는 사물의 특징을 매의 눈으로 포착해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 재창조한 것이다.

 

엄재원 작가는 공예와 예술작품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공예는 본래의 기능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써의 기능 또한 가질 수 있다'라고 얘기하려는 듯 하다.

 

 

 

공예? 예술? : 지울 수 없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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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기록이 온라인으로 남겨지는 시대에 '지운다'라는 행위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기를 블로그에 쓰고, 일상 순간들을 인스타그램에 남기며, 나의 생각을 댓글로 쓰는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이 남겨지는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 나의 글을, 나의 사진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해서 남겨둔다고 하면, 내가 나의 것을 삭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삭제하려는 행위 자체가 또다시 기록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Delete키가 사라진 세계를 살고 있다. 다소 무섭게 느껴지기도, 어찌보면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삭제 불가' 상태는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칼이 될 수도, 방패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우리의 흔적들은 어떻게든 형태가 남아 온전한 그 순간을 기록해내고 있다. 공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며 다시 만드는 그 과정은 작가 본인의 기억이든,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든, 소재의 특성에 기인한 시간적 상처든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작가의 한 순간을 가로채 간다. 이런 흔적이 덩그러니 공예 트렌드 페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흔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저게 공예야?'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흔적'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순간의 일종이기에,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히 기록될 하나의 사건이자 형태로써 구현된 것이기에, 당당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 외치는 건지도 모른다.

 

*

 

공예 트렌드 페어에서 인상 깊었던 세 작품을 살펴보았다.

 

첫번째 작품이 공예의 사전적 의미에 충실한,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공예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었다면 두번째 작품은 미적인 요소가 기능적 요소를 능가한 작품이라 볼 수 있겠고, 마지막 작품은 기능적 요소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미적인 요소와 의미만이 남아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난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사라졌듯, 공예 또한 기능과 의미 혹은 장식적 가치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단계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공예는 더이상 특정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작가의 소통 방법에 따라 공예의 모습은 지극히 개성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공예인지, 예술 작품인지, 그런 구분을 할 시도 조차 무색하게 만들 사물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경계가 사라지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도, 예술과 일상의 경계도,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모두 사라지는 세상도 이미 도래했다. 하나의 시각으로, 하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능동적 대처만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우리의 과제가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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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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