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 박성빈] '올바른' 인간들 사이에 결정하는 사람이 없으면

글 입력 2021.07.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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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명하고 싶어 혈안이었던 때가 있다. 어느 곳이든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들 어딘가에 편입되려 자기 이력을 포장하고 증명했다. 나는 같은 곳을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높은 위치의 ‘자리’는 파이가 정해져 있고 거기 정착하려면 다른 이들처럼 해야 했다. 조바심이 났다. 내 궤적을 그럴싸한 몇 줄로 설명하기 위한 방법을 고심했다.

 

D는 그 즈음 발견한 곳이다. 대학교 신문사 내 학생기자들이 만든 단체로 대학언론의 편집권을 수호한다는 독립언론이었다. 리브랜딩을 시도하는 중이라며 기자와 사무국에서 일할 학생을 모집했다. 서류문항의 질문에 답하며 대외활동치고 꽤 어려운 걸 묻는다고 생각했다. 언론의 기능, 편집권 침해 사례가 생길 때, 등등 한 차례도 생각해본 적 없는 걸 마치 살면서 여러 번 재고했던 것처럼 답했다.

 

면접에서는 좀 놀랐다. 질문은 누군가를 뽑고 걸러내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면접자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표인 조조는 사실 우리는 무엇도 없는 단체라고, 당신이 쓰는 기사가 우리 매체의 색깔이 될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듣고도 활동의지가 생기면 자신에게 문자를 달라고 했다. 나는 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무슨 기사를 어떻게 쓸 줄 알고. 나를 뽑을지 말지 가름 하는 건 당신네들 아닌가. 근데 나보고 이 단체에서 일할지 말지 결정하라고? 나는 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대표의 솔직함이 좋았다. 나 혹은 내 주변과 다르게 대표는 자기가 있을 곳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몇 번의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때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조직의 미션과 비전, 편집국 데스킹 시스템에 관한 논의, 여타 NPO단체와의 협업, 기성 미디어 말고 어느 언론사를 레퍼런스로 삼아야 할지 등등. 내가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던 단어와 문장을 다른 이들이 쏟아내는 광경에 마음이 졸아 들었다. 구성원들이 말하는 가치나 윤리도 경이로웠다. ‘옳은 가치’를 신념으로 쥐고 살아가는 이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떤 잣대랄 게 없어서 이게 온당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빛나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에 공감한 건 아니었다.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대한 감탄이었다. 가치나 윤리보다 그 가치를 표현하는 개인이 더 드러난 셈이다.

 

NPO나 레퍼런스의 뜻도 몰랐던 나는 누가 내게 질문하는 게 무서웠다. 그것들을 모르는 걸 다른 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들 높아 보였다. 회의 때마다 네이버 사전을 뒤적였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쫄았다. ‘아무 말도 못하는 걔’라는 평판이 돌고 내 밑천이 드러난 것 같아 눈치를 봤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나는 기사를 썼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회의의 단골 주제는 ‘어떤 보도를 할 것인지’였다. 장애인 이동권, 혐오표현, 사학비리, 대학 민주화, 페미니즘 등등의 보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오갔다. ‘좋은’ 보도에 대한 정의가 다 달랐다. 어떤 가치가 이로운 지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갈등이 일었다. 구성원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기껏해야 20대 중반이거나 20대 초입을 지난 청년들의 잣대는 유연하지 못했다. 주관이 없는 나는 각자의 말이 다 그럴 듯 해보였다. A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아서면 B의 주장도 일리 있다고 동의하는 식이었다. 나는 박쥐였다.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내가 D에서 활동을 시작한 건 나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이력서 공란을 몇 줄 채우고 인사 담당자가 원하는 그럴듯한 ‘서사’를 겪는 게 목표였다. 얼마 안가 나는 D의 구성원들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회사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기가 ‘옳은 인간’임을 누구에게든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가 타협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온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신호처럼 보였을 테니까.

 

누군가에게 증명하고 보여주려는 ‘옳음’이 진짜 옳은 게 될 수 있을까. 선한 말이나 행동에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임을 전시하고 싶은 욕망이 내포됐다면 그건 진짜 ‘선한’걸까. 위선 아닌가. 그런 식의 과시적 행동은 언젠가는 들통나버리지 않을까. 위선이 무지보다 훨씬 나쁜 거 아닐까. 정말 선한 사람이라면 자기 행동이 틀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을까. D에 있는 나날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정하는 사람이 없으니



D는 얼마 뒤 규모 있는 재단의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지원 금액이 컸다. 입주 공간도 대여해주는 사업이었다. 조조는 우리의 가능성이 발견된 거라며 좋아했다. 조직 구성원을 새로 받아들이고 수평적 데스킹 시스템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솔루션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좋은’ 언론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그게 패착이었다.

 

이전보다 자주 회의가 열렸다. 나는 재단 사업의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하며 꾸준히 참석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했다. 내가 첫 회의에 참석한지 4개월여가 지났는데 여전히 조직의 미션과 비전을 설정해야한다는 얘기를 했다. 구성원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D의 임무나 색깔을 늘어놨다. 다 제각각이었다. 조조는 그것들을 모두 반영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영된 건 없었다. 반영하려면 구성원의 논의를 거쳐야한다며 다음 회의에서도 미션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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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있었다. 그 ‘좋은 가치’를 실천하려면 결국 기사를 써야 했는데 정작 기사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재단 사업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못하면 지원금을 토해내야 할 판이었다. 팀을 두 개로 꾸려 두 주제의 탐사보도를 동시에 진행하자는 계획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재단은 가시적 성과를 원했기에, 언론계의 권위자를 멘토로 붙여주겠다고 했다.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멘토 유입은 결국 또 다른 데스크를 만드는 거라며 그들이 우리의 보도를 검열하면 어쩌겠냐는 거였다. 권위자가 우리 보도를 검열할만큼 한가할까. 재단이 말한 멘토의 뜻은 기사 방향이나 취재 방식에 대한 첨언을 해주는 이였을 거다. 갈등을 회피하기만 하는 나는 목소리 큰 이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 네 말도 동의할 구석이 있다고 했다. 재단 지원금을 인건비로 쓰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식에 기사를 쓰는 모두에게 급여를 달라는 의견이 나타났다. 당연히 기사를 쓰고 취재를 하면 비용이 소모되니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취재를 시작하지도 않고 ‘대가를 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조조는 그 의견을 묵살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지 않았다. 급여를 주냐 마냐로 또 다시 며칠의 시간이 낭비됐다. 두 탐사보도 모두 기사 한 줄 쓰이지 못했다. 재단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D는 수평적 의사결정구조를 표방했다.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다들 자기 의견을 쏟아냈다. 쏟아내는 이들은 자기 의견이 당연히 옳으며 모두 그 가치에 공감할거라고 믿었다. 그런 생각의 개인들이 모이니 하나로 일치되는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어떤 의제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생기면 그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휘둘리는 시간이 많았다.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조조는 대표였지만 대표이기 이전에 구성원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이였다. 그는 결정하기보다 계속 논의를 열었다. ‘올바른’ 인간들(진짜 '올바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이 모인 조직이라고 반드시 올바른 시스템이 정착되는 것은 아니었다.

   

D에서 활동을 마치고 곧바로 회사에 다닌 나는 위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수평적 의사결정구조는 모두의 동의를 얻고 나서 활동을 개진한다는 건데 그 동의에까지 낭비되는 시간이 많았다. 개진이 이뤄지는 일도 적었다. 회사는 달랐다. 국장은 ‘책임은 내가 질테니’라는 말을 하며 쓰려는 기사를 쓰라고 했다. 의견이 다른 부분이 생기면 대화가 몇 시간을 넘기지 않게 중재하고 일단 결정했다. 국장의 결정에 동의하지 못하겠어도 일이 진척되려면 따라야 했다. 그것이 옳든 틀리든 탁상공론만 며칠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기자들은 국장이라는 위계를 뒤에 업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며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종종 조조를 통해 D의 소식을 물었다. 주로 들은 건 조직의 미션과 비전을 다시 정립했다는 거였다. 그때와 다르게 오히려 위계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조조는 지쳐보였다. 내가 보기에 미션과 비전은 ‘설정’될 수 없었다. 구성원들이 매해 바뀌었다. D는 비영리단체고 언론사이기 전에 대학생들만 모인 곳이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다른 궤적을 그리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대학생이었다. 6개월 이상 활동하면 많이 한 축에 속했다. 조조가 제대로 된 비영리단체이자 언론사를 만드려면 자기 가치에 공감하는 소수의 몇 인원과 꾸준히 함께해야 했다. 조조가 진정 바라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언론사는 구성원이 3개월 마다 바뀌는 곳에서 실현될 수 없었다. 그래도 조조는 계속 시도했다. 불의에 대응하는 최적의 시기 같은 건 없다는 태도였다. 여전히 지금 자신이 속한 좌표에서라도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조조를 만났을 때는 그가 멋져보였다. 지금, 훨씬 더 냉소적인 인간이 돼버린 나는 조조가 꽤 피곤하게 산다고 여긴다. 그래도 조조가 꿈꾸는 세상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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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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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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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랑
    • 저도 그 활동을 하고 싶어보다 공백기가 무서워서, 조급해져서, 취업할 때, 남들이 볼 때 좋아보여서가 동기가 됐던 적이 있어요ㅠㅠ
      그리고 좋은 가치랑 돈을 벌어다주는 사업은 참 별개인 것 같아요. 그래서 경영이 어려운 걸까요ㅠㅠㅠㅠ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은게 있는 열정 가득한 조조분이 부럽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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