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의 낙관이 낙관이 되지 않도록 [영화]

원작 소설 기반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글 입력 2021.07.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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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요. 너무 낙관적이었나요? 하는 물음을 덧붙인 채로 가볍게 던진 말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 말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사랑을 언어로 논하는 것은 재미도 없고 뻔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관한 글을 써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놓인 창을 깨고 낙관이 낙관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무언가를 바꿔 가고, 가꿔 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면 가슴 속 가득 들어차는 따뜻한 공기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었다.


지난 밤에는 z와 함께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몽롱한 공기를 윤활유 삼아 주고받았던 대화 속 z와 나의 사랑에 대한 주장은 대충 이러했다.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면. 사랑을 경험함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이 곧 세상을 바꾸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누군가 듣기에는 낙관으로 읽힐만 한 말들이었지만 이 가볍고 무거운 말들 사이에는 분명 우리의 진심이 희석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z와 내가 사랑을 논하면서 진심 섞인 낙관을 마구 뱉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작품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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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1992년 개봉작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 영화는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노파 니니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에블린의 만남을 시작으로 전개된다. 니니는 양로원에서 만난 에블린에게 과거 휘슬 스탑이라는 카페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이 옛날 이야기에는 잇지와 루스라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이때 니니와 에블린, 잇지와 루스가 보여 주는 사랑은 세상을 새로이 인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이 세계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더 이상 낙관이 되지 않았다.

 

 

 

꿀벌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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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좋아한다며, 루스를 위해서였어. 

항상 하던 거라 괜찮아. 

  

 

영화에 등장하는 잇지와 루스는 결코 비슷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 잇지와 하라는 것만 착실히 따르며 살아온 루스는 어찌 보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이 둘은 벌집을 매단 나무가 있는 곳으로 소풍을 간다. 루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잇지는 벌들이 득실대는 나무에 겁도 없이 맨손을 집어넣고 벌집을 꺼낸다.

 

잇지와는 너무도 다른 생을 살아온 루스는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나서서 하는 잇지를 보며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잔뜩 신이 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잇지는 자랑스럽게 벌집이 든 유리병을 건네다 화난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스의 반응을 살핀다. 둘의 다름이 처음으로 충돌하는 장면이다. 이때 잇지는 자신이 가져온 벌집이 꿀을 좋아하는 루스를 위한 것이었음을 언급하며 진심을 내비친다.


 

벌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방금 전까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꿀벌들이 너를 좋아하나 봐. 

 

 

다름과 다름이 맞물리는 순간에는 말과 행동이 해가 되지 않도록 온 신경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이 사려깊음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그 뿌리가 견고하고 깊을 수밖에 없다.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자칫하면 기분이 상해 버릴 수도 있는 순간에 둘은 서로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려한다.

 

루스는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꿀벌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꿀벌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준다. 이후 이들은 함께 꿀을 맛보며 서로의 다름을 공유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다. 끈끈하게 늘어지는 꿀의 점성은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둘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휘슬 스탑 카페 (Whistle Stop Cafe)


 

 

 

잇지와 루스는 함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나누었지만 루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한다. 루스와 결혼한 남편은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성이었고, 따라서 둘이 살고 있는 그 집은 루스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어 주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잇지는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찾아가 그 집으로부터 루스가 물리적으로 분리돼 있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이후에 이들은 ‘휘슬 스탑 카페’를 차리고, 친구들과 함께 카페를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사랑으로 무언가를 바꾸어 나간다는 것은 때로 결연해야 하는 일이며 그만큼 고귀한 순간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는데, 사실 사랑으로 인한 변화는 그리 결연한 태도를 취할 필요도, 고귀하게 여겨질 필요도 없다.


함께 의견을 조율해 가면서 일을 하고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 나와 너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주어진 일상에 천천히 힘을 들이는 것. 그렇게 젖어들어 건강한 일상을 만들어 내는 변화를 휘슬 스탑 카페에서는 실현하고 있었고, 이 일상들은 고귀하다기보다는 따뜻하고 유쾌한 편에 가까웠다.

 

깔깔 웃어대며 시간을 보내는 잇지와 루스의 모습은 무언가 바꿔 가고, 가꿔 가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보는 이들마저 웃음이 끊이질 않는 사랑을 나누고 싶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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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여길 떠나지 말라는 거야.

  

 

변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합을 미리 맞춰 본 것처럼 착착 이루어지는 법이 없고, 무언가 뒤틀리거나 엇나가 버리는 일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밤 휘슬 스탑 카페에는 루스의 남편이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주장하며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성과 흑인이 운영하는 이 카페에 백인 남성인 루스의 남편이 홀로 침입했다는 것은 약자들이 머무는 공간에는 언제든 강자인 자신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이 사건은 이들 사이 분명한 위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약자들의 주변에는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들이 일상적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휘슬 스탑 카페의 구성원들은 아무 힘 쓰지 못하는 절대적 약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적인 상황에 맞서 일상들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특히 잇지는 남편과 관련한 사건을 자책하며 자신이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루스에게 ‘여길 떠나지 말라’고 말하며 사랑으로 가꾼 그들의 공간과 일상을 지키고자 확신을 주고, 또 다시 용기를 낸다. 휘슬 스탑 카페에서의 잇지와 루스는 꿀처럼 끈끈한 것 이상으로 견고해지고 있었다.

 

 


토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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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다 하기엔 너무 늙었고,

늙었다 하기엔 너무 젊어요.

 


에블린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 그 중에서도 가정 주부인 중년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에블린의 남편은 그녀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았고 그들의 부부 생활은 에블린에게 우울을 안겨 주기 십상이었다. 위 대사는 갱년기를 경험하며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홀로 고이고, 치이기만을 반복했던 에블린의 상황을 말해 준다.

 

그러나 양로원에 방문할 때마다 니니에게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던 에블린에게도 새로운 세상은 열린다. 잇지와 루스가 보여 주었던 사랑이 현재를 살고 있는 에블린에게도 가닿은 것이다.

 

에블린은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에게 굴하지 않았고, 남편의 결정이 아닌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동했고, 결정적으로 우울의 원인을 찾아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토완다!’는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한 에블린이 용기가 끓어오르는 순간마다 입 밖으로 내었던 시원한 외침이었다. 이 외침의 반복으로 에블린은 건강한 일상을 되찾는다.


한편 영화에서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니니가 에블린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여성과 여성이 연대를 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나에게 있었던 일과 그 일을 경험하며 느꼈던 것들을 전달하는 과정은 에블린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국 듣는 이가 위치해 있는 환경을 다시 되돌아 보게끔 하는 힘을 갖는다. 이렇게 영화의 구성 방식은 그 자체로 여성들의 연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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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서비스 내에서도 어떤 영화를 볼지 오랜 시간을 들여 고르거나 고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작품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중 만났던 영화가 이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였고, 나는 아직도 이 영화를 만났던 순간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


잇지와 루스 그리고 휘슬 스탑 카페의 이야기는 에블린뿐 아니라 나에게도 세상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어떤 영화에도 큰 끌림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재생해 볼 것을 추천한다. 재생하기만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이 ‘토완다!’를 외치도록 만들 것이고, 몸속에 들어차는 따뜻한 공기를 느끼며 별 다섯 개를 꾹꾹 찍어 누르도록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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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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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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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지
    • 오늘도 잘 읽고 가요. 달콤하고 견고하고 사랑스럽고 유쾌한 사랑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이 영화를 추천받아 봤는데 그 순간을 귀히 간직하고 있어요.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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