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각] 나는 어느 계절에 자라 어른이 될까요

나는 여름에 자라고, 가을이 되고 싶어
글 입력 2021.06.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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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주는 작고 확실한 행복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 그러한 순간이 우연히 찾아오면 기쁨은 배가 된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방금 읽던 책 속에서 본 낯선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그날의 어느 다른 시간에 혹은 근시일 내의 어떠한 시간에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그 단어를 마주했을 때. 이상하게도 이런 순간들이 내게는 꽤 자주 찾아온다. 그렇게 만난 단어들은 쉽게 잊고 싶지 않고, 또 쉽게 잊지 않게 된다. 그리고 더워지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계절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 읽지 않고 반납하려던 책을 우연한 심심했던 밤에 들춰보았다가 목차에서 계절의 이름들을 발견했다*.

 

우연히 마주하는 순간들을 느낄 때마다 세계가 은연중에 내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 메시지는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데, 대부분의 메시지는 내게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떠한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이 글의 문장들이 쌓아 올려졌다. 문장들로 쌓은 작은 탑을 상상해보며, 이러한 우연들이 주는 행복을 지금보다 더 자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소소한 우연의 행복이 더욱 더 자주 찾아오기를.

 

*이 글을 쓰기 전 우연히 집어 들었던 책은 손원평, 『프리즘』이다.

 

 

 

일상조각 세 번째. 철과 철


 

사람이 자신 스스로 ‘철들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은 언제일까? 일상 속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했던 ‘철들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는 힘을 가지게 되다.’이다. 이 단어의 의미가 또 다른 동음이의어인 ‘철’로부터 왔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계절의 유의어로 알고 있는 ‘철’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자연 현상에 따라서 일 년을 구분한 것.

2. 한 해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

3. 알맞은 시절.

 

 

‘철들다’는 말의 의미는 계절마다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를 아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봄철에는 씨를 뿌리고, 가을철에는 자란 것들을 수확하는 때를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를 보면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로 인식하는 것이 예로부터 중요했던 모양이다.

 

계절의 흐름을 인식하는 일과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 긴밀한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은 무수히 스쳐 지나왔을 수많은 계절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준다. 과연 우리는 어느 계절들을 어떻게 통과하며 자라나고 또 나아가고 있는 걸까.

   

 

# 여름. 계절을 보내고 철이 들었다

 

[크기변환]여름 하늘.jpg

 

 

일상을 흘려보내다가 간혹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특별히 (자신도 모르게) 집착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게는 계절감이 그러한 것 중 하나이다.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계절과 날씨에 대한 문장들이 가득하고, 사진첩에는 사람보다는 계절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날씨와 자연물이 더 많다.

 

계절에 대한 생각의 결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 듯하다. 단순히 가을이 제일 좋고, 날씨가 극단적인 여름과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 말하던 과거와는 어느 순간 멀어졌다.

 

더위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여름이면 땀이 나는 것이 싫어 설렁설렁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게 되었고, 피부가 달아오르면 그 온도가 주는 불쾌감에 더 열을 내는 일을 하기를 멈췄다. 몇 년 전까지 여름은 단연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었고, 우리나라의 여름처럼 고온다습한 나라보다는 그렇지 않은 나라를 동경했다.

 

여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씩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가까운 사람의 한마디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은 여름을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보낸 여름날의 풍경 사진 속에는 방학 동안 학생들이 빠져나간 길이 여름의 햇빛을 받아 더욱더 푸르러 보이는 나무 사이에 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사진 속 나무들이 주는 푸른 생명력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순간, 여름을 싫어하는 마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의 좋음을 만끽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름을 싫어했던 고작 몇 해 전의 여름과 올해의 여름을 비교하면 최근 가장 달라진 모습은 역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는 일. 좋음과 나쁨이 공존하는 여름의 속성처럼 사람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여름을 무조건적으로 싫어했던 어느 날에 만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미운 면이 그 사람의 전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다른 부분들 모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여름, 여름을 좋아해 보기로 다짐했고 이후 그 사람을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타인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지, 왜 나와는 맞지 않을 수밖에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부정적인 감정 자체를 잘 견디지 못하는 내가 다시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전히 여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나의 신체 일부 그 어디보다도 작은 벌레들의 존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온기에 기대기보다는 각자의 건조함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그래도 결국 나는 어느 계절에 가장 자라났을까, 생각해 보면 결국 이십여 년을 싫어했던 여름에 자라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쉽게 피어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부정을 덮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름이라는 철을 극복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미워해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사건도 많다. 하지만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걸 제외한 것들에 조금 더 관대해지자 내 세계는 전보다 더 넓어졌고 동시에 아름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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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여름의 햇살

 

 

# 가을.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의 좋아하는 계절을 들으면, 신기하게도 대부분 계절의 이미지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가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묻는 일이 곧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의 결을 알게 되는 일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가을을 꼽았다. 그다음으로 겨울이나 봄을, 마지막으로 여름을 꼽았다(여름을 좋아하게 된 것과 별개로 여름 특유의 청량함과 색감이 선명한 이미지는 왠지 나와는 먼 것처럼 느껴진다). 가을의 분위기를 동경하고 좋아하는 만큼, 가을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으로 느껴진다.

 

 

[크기변환]가을 한강.jpg

 

 

더위 혹은 추위라는 극단적인 날씨에서 벗어나 선선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 날씨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날씨와 온도처럼 적당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눈길을 끄는 꽃들과 선명한 초록빛 물결로 싱그러운 잎들도 좋지만, 봄과 여름을 지나며 과실을 맺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는 듯 초록을 잃고 바스락거리는 갈색의 옷을 입은 잎들에 더 눈길이 간다. 어쩐지 가을의 속성은 내가 추구하는 사람의 속성을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

 

기억이 희미한 어린 시절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생각한 순간만은 또렷하다. 이 시절 이후로 어쩌면 조금씩 ‘철’들어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가장 많이 읽은 책 한 권을 꼽자면 스테파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시리즈 중 1권인 『트와일라잇』이다. 시리즈의 다른 책은 한두 번씩 읽고 말았지만, 이 한 권의 책만은 책장이 닳을 정도로 자주 읽었다.

 

이 책의 주인공, ‘벨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이타적’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타’의 의미와 단어에 담긴 무게를 잘은 몰랐음에도 막연하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한 이후의 삶과 삶 속 순간들은 어쩌면 매 순간이 투쟁의 시간이었다. 신이 한 인간을 만들 때 ‘선함’이라고 쓰인 약물을 실수로 와장창 부어버려, 태어나기를 착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저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나를 지키는 마음이 같다고 생각하며,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피 흘리더라도 스스로 지혈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을 뿐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만의 기준을 하나씩 세워가는 일과 같다.

 

따뜻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타인이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그를 무조건 비난하는 대신 이해의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정말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불의를 참고 넘기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 필요한 일에 목소리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약한 힘을 가진 인간이지만 자연을 더는 괴롭히지 않고 싶었다.

 

사람이 자신 스스로 ‘철들었다’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은 언제일까? 라는 글의 시작에서 던진 질문에, 나 자신에게 ‘난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순간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철드는 중이다.



# 부록. 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하여 : 내게 빛나는 것들의 목록 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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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내게 빛나는 모든 것>포스터/2019 내게 빛나는 모든 것들의 목록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은 엄마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세상에서 빛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연말에 이 연극을 보고 다음 해부터 연극 속 아이처럼 ‘내게 빛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 해의 마지막, 그동안 적었던 문장들을 한곳에 모아 적으며 드문드문 적어 본 하루들 중 가장 나를 위로하거나 행복을 주었던 일들은 그 한 철에만 누릴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계절의 순간들을 발견하고 느끼기 위하여 이 목록을 만들어보기를 권한다. 사진으로 목록을 만들어도 좋다. 가볍게 발견한 계절의 아름다움을 적은 문장과 찍힌 사진들은 스쳐 지나가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일상을 끊임없이 건들고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철들을 통과하며 철든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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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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