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지랖의 생태계 [사람]

글 입력 2021.03.26 12: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오지랖의 생태계



사당역 4번 출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사를 한 이후 사당역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버스 정류장,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열 시,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마스크 안에서 입을 벌렸다. 여기 무슨 퍼레이드라도 하나? 나는 7080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도무지 줄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듯 이어폰을 끼우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방금 막 헤어진 일행과 전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버스는 오 분 남았고, 지도 어플은 정류장 위치만 가리킬 뿐이었다.


학생, 어디 가?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나에게 도를 묻는다면 레를 대꾸할 생각도 있었다. 바리바리 짐을 챙겼지만 단정히 줄에 합류되어 있었던 한 할머니였다. 저 집에 가는데요. 아니지, 이 대답이 아니었다. 퉁명스러운 젊은이의 버릇이 튀어나왔다.

 

허허 웃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근데 왜 여기 서 있어. 몇 번 버스 타? 칠천팔십 번이요. 여기는 칠천 번 줄이야, 저리로 가면 번호 써져 있거덩. 그래도 꼭 다시 물어보고 타. 넵, 감사합니다. 급한 마음에 이어폰을 빼낸 탓, 오랜만에 낯선 이의 말을 또렷이 알아듣고 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내 줄을 찾아 움직였다.

 

이 혼란 속에서, 어서 집으로 옮겨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영수증 물어보는 거예요


 

오늘의 험난한 귀갓길이 있기 얼마 전, 한 국숫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문과 결제, 서빙을 모두 기계가 하는 곳이었다. 부모님과 나들이를 나온 참이라 자연스레 그런 ‘어려운 일’은 내 몫이었다. 정신없이 메뉴판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머뭇거리는 노부부를 만났다.

 

몇 번의 주문 취소와 결제 시간 초과를 겪은 그들은 차근차근, 커다란 목소리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음식 주문에 성공했다. 그런데 ‘영수증을 출력하시겠습니까?’ 글씨가 콩알만 하게 등장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지는 숫자 카운트를 바라봤다. 이게 뭐지? 나도 몰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뒤에서, 나는 멈칫거리며 그 모습을 방관했다.


그들이 어렵게 직원을 찾았다. 영수증을 달라는 것이었다. 직원은 ‘처음에 기계에서 물어본다.’라 퉁명스레 대꾸했다. 국수를 불어 식히다 괜히 뜨끔한 마음을 떠안았다. 영수증이 나온다, 안 나온다를 가지고 실랑이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마음을 콕콕 찔렀다. 그냥 오지랖 한 번 부려 볼걸. 영수증 필요하시면 이거 누르세요, 하고.


‘요즘 우리’는 어른들의 아는 체를 불편해한다. 물론, 가끔 그들이 우리 기준에서의 선을 넘는다는 것은 안다. 지하철에서 대뜸 ‘머리색이 너무 밝다’라고 한다거나, 딸 같은 아가씨들이 한밤중에 택시를 타면 아주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 내 기분에 따라 귀찮고 쓸데없이 느껴지는 언사들 말이다.

 

하지만 오지랖이 필요한 순간 또한 분명히 있다. 면접을 보러 가는 날, 허리께에 출처 모를 시멘트 가루가 묻었다거나. 가방 문이 활짝 열리다 못해 소지품을 모조리 보여 주고 다녔다거나, 그런 날 말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채 집에 돌아오면 나를 스친 모든 이들이 원망스러워지는 날.


이런저런 마음과 핑계와 투덜거림이 있지만, 우리는 오지랖의 종류를 선택할 수 없다. 너무 춥게 입었다며 타박을 하는 어른과 밤이 늦었다며 택시를 양보하는 어른은 어쩌면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바로 어제, 내가 모질게 지나쳤던 낯선 이의 말 한마디가 오늘의 나에게 길을 알려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지랖을 부리기도, 받기도 낯설어하는 반면 몇몇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남에게 훈수를 둘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단순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호의를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머쓱함을 어떻게 감당할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누구를 기다리는 거예요’라고 대꾸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그렇다면 도움이 필요한 확실한 순간은 무엇이 있었나, 다시 짚어 본다.

 

 

 

용기를 내 보는 일


 

지난겨울, 운전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갓 구매한 초보운전 스티커를 방패 삼아 운전대를 잡았다. 목동역 사거리 즈음이었나, 횡단보도 앞에 신호를 받아 멈춰 섰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멍하게 바라보는데, 한 명이 눈에 걸렸다. 발목까지 오는 패딩을 걸쳐도 몸이 떨리는 날씨에 얄팍하고 현란한 잠옷을 달랑 걸친 할머니.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지나치는 그녀를 보다, 조수석에 오른 친구를 톡톡 쳤다. 야, 뭔가 이상하지 않냐. 경찰에 신고할까? 마음이 급해졌다. 유턴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그 할머니는 다른 행인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게 넘겨졌다. 알츠하이머가 오셨거나, 추운 날씨를 미처 생각지 못할 급한 일이 있었겠지. 아주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때의 패배감이 훤하다.


누군가의 간절함을 알아채는 오지라퍼가 되기란 쉽지 않다. 깊은 관찰을 기반으로 탁월한 타이밍에 개입해야 하며, 상대방의 기분을 해쳐선 안 된다는 법칙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칙을 쥐느라 남을 도울 손이 없었다. 모든 것을 비우기로 했다. 나서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에 용기를 불어넣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이민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