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워지는 가짜 달 아래 얻은 기쁨은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영화]

영화 <종이 달>에 대하여
글 입력 2021.03.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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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달

 

2014년 작

126분. 드라마, 서스펜스.

청소년 관람불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미야자와 리에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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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찬송가 합창 소리로 시작된다. 첫 장면은 수수께끼 같다. 책상 위에 5만 엔을 늘어놓은 한 여학생이 자기보다 더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있는 봉투에 그 돈을 넣는다. 소녀가 누구인지, 그 돈은 무엇이고 사진 속 소년은 또 누구인지 아무 설명 없이 화면은 바뀌어 관객을 1994년도로 데려간다.


일본의 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하며 장기침체가 시작되는 시기다. 일본에서 아직 은행 업무가 완전히 전산화되기 전, 현금 인출과 금융 상품 판매 등이 은행원의 방문으로 이뤄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파트타임 4년 차 은행 직원이었다가 얼마 전 계약 사원이 되었다. 계약 사원이 되자마자 중요 고객인 히라바야시라는 노인으로부터 금액이 큰 예금 상품 계약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그날 그 집에서 노인의 대학생 손자인 코타를 처음 만난다.


승진과 거래 성사. 일상에 긍정적인 사건이 연달아 생긴 셈이지만 리카의 삶은 여전히 감정적으로 단조롭다. 고양되지 못한다. 직장에서는 상사로부터 역시 리카 씨의 매력 덕분 운운하는 말을 듣는다. 월급이 오른 기념으로 남편에게 커플 시계를 선물했더니 남편은 출장 선물이라며 까르띠에 시계를 사 온다. ‘왜 시계야?’라고 묻는 리카에게 ‘이제 그 정도 차고 다닐 때도 되잖아?’라는 답이 돌아온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주택 대출을 같이 갚으려는 리카에게 그 정도는 자기 월급으로 된다며 당신이 번 돈은 당신 쓰라고 하기도 한다. 리카에게는 엄연한 돈벌이가 남편에게는 용돈벌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주체가 아니다.


어느 날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잔뜩 사게 되는 리카. 현금이 딱 만 엔 모자라서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다. 적은 금액이고, 바로 채워 넣지만 그녀가 고객의 돈에 손을 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작은 사건으로부터 파국은 서서히 찾아온다. 한참 연하인 코타와 내연 관계가 되는 것은 이 일이 있고 나서다. 아마도 버블경제의 수혜자일 노년의 고객들과 고액의 은행 상품 판매에 익숙해지고 요령도 붙은 리카는 애인과의 밀회에도 익숙해진다. 이제 손님들 앞에서 영업용 미소도 잘 짓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수수하던 남색의 옷차림은 점점 화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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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의 연하 애인, 코타.

 

 

그러다 애인 코타의 빚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단다. 리카는 히라바야시 노인의 돈이 입금되기 전, 은행에 고객이 변심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파기되어야 할 영수증을 훔쳐서 고객을 속이고, 갈 곳 없어진 2백만 엔을 횡령한다. 돈이 없어 대학을 관두겠다는 코타가 계속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처음으로 범죄를 저지른 날, 남편의 상하이 전근 얘기를 듣는다. 당연히 리카가 자기를 따라올 줄 알았던 남편에게 리카는 절박하게 말한다. “지금은 못 그만둬. 내가 책임지고 하는 일이니까. 나밖에 못 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을 코타의 구원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리카에게는 이제 역할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주도적인 역할이.


남의 것을 훔쳐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리카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파국을 맞는다. 횡령 금액이 2천만 엔 수준으로 규모가 커진 범죄는 결국 원칙적인 직원 스미 유리코에게 덜미를 잡힌다. 직장에 모든 범죄 행각이 밝혀진 리카는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스미에게, 내가 당신보다 비참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야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냐고 화를 낸다. 그러자 스미가 묻는다.


“당신 지금 비참해?”


“당신은 한 거잖아.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을. 수천만 엔을 썼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한 거 아니야? 그걸로도 안 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거기 그렇게 앉아서 나를 보면서, 비참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신이잖아.”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 졌다. 리카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을까. 리카도 이런 결말을 예견하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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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의 범죄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스미.

클라이맥스에서 리카와 스미의 대화가 영화의 주제를 보여준다.

 

 

 

1. 그녀를 돌진하게 한 건 무엇이었나.


     

처음 횡령한 2백만 엔의 출처를 둘러대며 손에 쥐여주는 리카에 코타가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영화 오프닝에 나왔던 찬송 합창이 배경음악으로 울려 퍼진다. 영화 클라이맥스에 <종이 달>의 주제를 암시하는 스미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리카의 학창 시절 장면이 교대로 나타난다.


리카는 천주교 학교를 다녔다. 학교 주최로 해외 결연 아동 모금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수해로 고난을 맞은 아이들에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도움을 주자는 취지였다. 리카는 자기 결연 아동으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고 큰 기쁨을 느낀다. 문제는 동복이 하복으로 바뀔 만큼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긴다. 시간이 지난 만큼 관심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학급의 첫 모금액만큼 돈이 모이지 않자 리카는 아빠의 지갑에 손을 대 혼자서 5만 엔의 모금액을 채운다.


학생이 척 봐도 자기 돈이 아닐 것 같은 거액을 냈으니 학교 측은 기부금 접수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리카는 이를 공지하는 수녀님에게 항변한다. 자신은 과시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했다고. 그걸 위해선 어떠한 수단도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하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렇지만 시스터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이들이 기뻐한다면 전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기부한 것과 은행 고객의 돈을 횡령하여 코타를 도운 것. 두 사건은 뿌리가 같다. 바로 리카가 원하는 것, ‘도덕적 성취감’.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극의 중반까지 코타와의 치정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축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이 화장품 구매 장면의 순서이다. 고객의 돈에 처음으로 손을 대는 장면. 코타와 사귀고 나서 화장품을 샀다면 어린 남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흔한 장면이었을 것이나 이 일은 그전에 일어난다. 사랑에 눈이 멀어 그녀가 바뀐 게 아니다. 그녀는 이미 어릴 적 아빠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본 사람이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선행을 했다고 기뻐한 사람이다.


그런 리카에게 코타는 드디어 만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그런 존재였다. 코타의 빚 얘기를 듣기 전까지 리카 주변에는 여태껏 자신이 ‘도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 그녀보다 경제력 있고 지위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불합리한 삶의 무게를 묵묵히 버티고 받아들이는 스미처럼, 리카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던지. 그런데 코타는 부자 할아버지에게 도움받기는커녕 비난까지 받는 ‘불쌍하고도 약한’ 애인이다. 불우한 코타를 돕는 것은 리카의 기쁨. 코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은 덤이다. 그토록 바라던 것을 찾았으니 이제 그녀는 달려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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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달을 지우는 리카.

 

 

 

2. 가짜와 진짜.



그렇다면 리카는 두렵지 않았을까? 그녀의 수단은 범죄였고, 범죄 행각은 결국 타락 혹은 발각을-아니면 둘 모두를- 부를 텐데. 이에 대해선 스미와의 대화에서 리카가 직접 답을 준다. 코타와 첫 밀회를 하고 돌아오던 날 새벽. 하늘에 걸린 새벽달을 손끝으로 긁어보니 지워지더라고. 그건 가짜니까. 처음부터 모든 게 다 가짜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고. 가짜니까 당연히 언젠가 끝날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고.


 

“가짜니까 망가져도, 그리고 망가뜨려도 상관없잖아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서 아… 난 자유롭구나 하고.”

“그래서 진짜 하고 싶었던 걸 한 거예요.”

 


제목이 <종이 달>인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첫째로 리카가 자유의 수단으로 삼았던 돈을 암시한다. 이 사회에서 신용과 가치를 내포하지만, 사실 소재로만 놓고 보면 그림과 숫자가 그려진 종잇장. 먹을 것도 입을 것도, 훨씬 사치스러운 것들도, 심지어 시간도 구매할 수 있지만 돈 자체는 사람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그 안에서 주거할 수도 없다.


둘째로 종이 달은 일본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상징한다고 한다. <종이 달>을 포함해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두 작품을 다룬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91편에서 말하길, 일본에 필름 카메라가 보급됐을 때 스튜디오에서 초승달 모양의 종이 달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게 유행이었다. 그래서 환한 웃음을 짓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제일 행복했던 한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리카가 긁어낸 달도 아주 얇은 초승달이었다.


그러나 스미의 말대로 ‘종이에 불과하여 가짜일 수 있는 돈’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결과적으로 리카는 훔친 돈으로 뭔가를 소유하지 못했다. 차라리 부동산이라도 샀다면 팔아서 횡령한 돈을 메꿀 수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다. 코타와 사치스럽게 지내는 동안 돈을 물처럼 썼다. 훔친 돈은 더 이상 고객의 돈도, 리카의 돈도 아닌 채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가짜로’ 펼쳐진 시간 안에서 그녀는 얼마간 행복했지만 마법은 영원하지 않다. 코타조차 리카를 떠나간다. 돈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연인 관계는 변질된 것이다. 리카 몰래 대학을 자퇴한 코타는 또래의 여자와 바람도 피운다. 사치 속에서 ‘이런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불안했던 코타는 ‘그 집(리카가 마련한, 둘이 살던 집)에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바람피운 애인 앞에서 화내지도, 울지도 않던 리카는 다음 주에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만나자고 하지만 거부당한다. 이에 리카는 담담하게 끝을 말한다. 어차피 전부 가짜였으니까. 그렇게 역할극은 끝이 난다. 그러나 현실은 찾아온다. 가짜여서 망가뜨려도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도 대가는 현실에서 치르게 마련이다. 화려하고 행복했던 한때가 얄팍하게 걷어지는 순간 리카의 낯빛은 어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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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카의 삶



가짜 달을 긁어내기 전까지 리카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안정적이지만 사실 부유하듯 떠 있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주체가 아니었던 삶. 리카가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인생에서 무언가 꼭 붙들고 있는 것도 안 보이고, 인생의 어떤 요소가 그녀를 현실에 꼭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달이 지워진 순간 쉽게 가짜 삶에 뛰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코타의 사연과 구제로 풍덩 빠트린다. 리카가 붕 떠 있던 삶을 어디 한 군데에 푹 잠기게 한 것, 어딘가에 확 붙들리게 한 것은 리카가 그 행복한 순간을 가짜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가짜니까 즐길 수 있다. 자신도 즐겨도 된다. 고맙다는 편지에 만족하던 어린 리카가 애인에게 ‘베푸는’ 것을 같이 향유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물론 다른 나라의 소년과 바로 옆에 있는 코타라는, 물리적인 거리 차이도 있지만 나는 이 점이 리카가 이제 자신의 ‘선행’에 직접 보상까지 챙기는 것으로 보였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 리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단죄하거나 딱히 비판하지도 않는다. 리카가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현실이 버티고 있는 문으로 나가지 않고, 창문을 깨고 도주한 리카는 잡히지 않고 외국으로 도피한다. 그곳 시장에서 떨어진 과일을 주워 주다 우연히 자신이 예전에 기부금을 보냈던 소년을 만난다. 어른이 된 소년은 과일을 파는 노점에서 자기 일을 갖고 잘 사는 듯 보인다. 리카는 놀란 채로 서 있다가, 자신이 주운, 그가 파는 과일을 베어 먹는다. 그리고 멀리서 현지 경찰이 보이자 인파 틈으로 섞여 사라진다. 영화는 그것으로 끝이다.


리카가 (값을 치르지 않고) 과일을 먹는 장면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과일을 베어 먹었다기엔 그녀 눈은 똑바로 앞을 향한다. 리카는 은연중에 자기 몫이라고 느낀 게 아닐까. 그 소년이 잘 성장한 것에 자기도 어떤 몫을 했다고. 아…. 리카는 앞으로도,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의 뿌리 깊은 욕망대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보다 어려워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파국으로 돌진해서라도 그에게 베풀며, 베푼다고 생각하며 그 순간의 가짜 삶을 주도할 것이다. 아마도 평생….

 

지워지는 가짜 달 아래서 리카가 얻은 기쁨은 그 순간 진짜였고, 애초에 그녀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 욕망에서 기인하며, 그녀 자신이 또 다른 설득력을 얻었으니.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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