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들 [문화 전반]

내일을 살아가는 원동력, 내 마음 속의 등불
글 입력 2020.11.0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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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 days4tri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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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추억이란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그리움이 아닌, 눈 쌓인 거리를 걸을 때면 고요한 음악을 들을 때면 잊힐 듯 잊히지 않고 생각나는 기억들이다.

 

과거는 늘 현재보다 강렬하다. 미화가 무서운 이유는 수많은 기억의 단편 중에서 스스로 유리한 감정만을 골라 추출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 결코 바꿀 수 없는 시간대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마치 원하면 언제든지 꺼내어 볼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말이다.

 

추억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현재와의 괴리감이다. 살아가는 것이 괴로울 때마다 개인은 가슴 한 켠에 저장해 둔 기억들로 도피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어느 무엇도 순간을 왜곡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현실이 닿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자 홀로 고여있는 시간들에 대한 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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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의 정석 <로마의 휴일>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로마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흑백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통 튀는 오드리 헵번의 매력과 아름다운 로마의 풍경들은 마치 색감을 입힌 듯이 생생하다. 우리는 고작 하루를 같이 보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럽 각국을 순방 중이던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로마에 체류한다. 그녀는 갑갑하고 틀에 짜인 왕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껴 밤 몰래 로마 대사관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특종을 노리는 기자 조(그레고리 펙)를 만나 처음으로 새장 밖의 자유를 누린다.

 

조는 기삿거리를 만들고자 신분을 속인 채 동료에게 그들의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한다. 그는 앤과 함께 젤라토를 먹고, 스쿠터를 타고,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며 점차 그녀의 순수한 모습에 이끌린다. 결국 두 사람은 앤을 쫓아오는 왕실 경비대를 따돌린 뒤 유람선 위에서 사랑의 키스를 나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었다. 앤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본래 자신이 속해있던 왕실로 돌아가야 했다.

 

 

"약속하세요, 제가 저 골목에 들어가면 더 이상 날 보지 않겠다고. 제가 당신을 떠나듯이 나를 두고 떠나세요."

 

 

그녀라고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을 외면하고 싶었을까. 감성적이고 철없게만 보이던 앤이 조를 두고 돌아서는 모습은 마치 행복한 꿈에서 강제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내가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다음 날, 대사는 돌아온 앤의 행실을 나무란다. 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추억이란 책임져야만 하는 현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임을 일깨운다. 만약 앤이 공주의 직위를 버리고 사랑을 택했다면 그들은 물론 행복했을 것이다. 로마에서 보낸 하루가 추억이 아닌 현재가 될 수도 있음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앤은 그 기억을 가슴 깊숙이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겨두기로 선택했다. 세상에는 순간의 감정과 충동보다 개인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삶이 짊어지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 가운데 추억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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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기자회견장에서 조는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봉투에 담아 앤에게 건넨다. 그리고 묻는다.

 

 

"이번 순회 여행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로마였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로마입니다. 나는 평생토록 제가 온 이 로마를 기억할 거에요."

 

 

대답을 들은 조는 뒤돌아 나가고 앤 또한 본래 공주의 자리로 돌아간다. 카메라가 담아낸 그의 발걸음은 경쾌하면서도 묵직했다.

 

추억이 양면적인 이유는 그때 그 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어떠한 왜곡이나 개입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미련이라고 부른다. 누군가 나와 함께 영원히 박제된 순간들을 공유한다는 믿음은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된다.

 

 

한 소년이 하얀 백사장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소년이 따스하고, 하얀 모래를 두 손 가득히 움켜잡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손을 들어 올리자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별입니다"

 

소년은 흘러내리는 모래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미련입니다"

 

다행히 손 안에는 흘러내리지 않고 남아있는 모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움입니다"

 

소년은 집에 가기 위해 모래를 털어 버렸습니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모래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추억입니다"

 

- 카릴 제미슨, 한 모금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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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내도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모래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여운이다.

 

아이가 손을 씻으면 그 모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금빛 모래를 보았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모래를 가지고 놀던 바닷가가 그리울 때, 혹은 그 배경 속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아이는 금빛으로 반짝이던 모래의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변한다. 손가락 틈새로 모래는 끝없이 새어 나간다. 다음에 모래사장을 찾았을 때 우리는 그때 그 모래알들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뇌리에 박힌 선명한 금빛 기억들은 모래사장을 여전히 아름답게 만든다.

 


[허향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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