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혼자서는 닳아갈 수 없는 우주적 사랑 맛보기: 지구에서 한아뿐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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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번잡하게 느껴지고, 심신이 지칠 때 추천할 만한 도서가 있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구에서 한아뿐>을 말하고 싶다. 따뜻하다. 그리고 사랑스럽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환경을 아끼며 저탄소 생활을 실천하는 주인공 한아가 등장한다. 한아는 자신의 신념을 담아 옷을 리폼하는 <환생>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의류 수선집을 운영하며 지낸다. 그런 한아에게는 만난 지 오래된 남자친구 경민이 있다. 하지만 경민은 한아와는 다르게 늘 자유롭게 세상 이곳저곳을 여행하길 좋아하는 탓에 그들의 관계에는 그을음이 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민이 여행을 떠난 캐나다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민을 걱정했던 한아는 무사히 돌아온 경민을 보며 안도하지만, 그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보면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책이 나의 올해 베스트 도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재밌는 지점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바로 경민의 입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초록빛 섬광을 한아가 발견한 시점이다.
알고 보니 경민은 지구 밖의 행성에서 한아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지구까지 2만 광년을 달려온 로맨티시스트 '외계인'이었던 것이다. 한아는 자신의 외양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과의 계약으로 팔아넘긴 채 자신을 지구에 두고 영영 떠나버린 야속한 '진짜 경민'을 원망하지만, 결국은 '외계에서 온 경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그렇게 진짜 경민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게 된 외계인 경민은 그동안 진짜 경민이 한아에게 주지 못했던 다정함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한아가 그런 그의 진심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렇게 우주적인 사랑고백을 이렇게나 담백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간결하고도 매우 낭만적인 문장의 연속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크게 기뻤던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사랑스러운 표현들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편한 침묵이 흐르는 상황에서는 '젤리 같은 공기, 아주 맛없는 젤리 같은 공기'라는 표현을, 단단하지만 누구보다도 한아를 아끼는 다정한 친구 유리는 '이런 갑각류 같은 사람, 겉껍질 안쪽엔 부드럽기가 그지없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섬세하고도 독특한 질감의 표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인물들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마치 이미지처럼 편집되어 동화 같은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는 아티스트 아폴로의 팬클럽 회장인 인물 주영이 등장하는데, 주영이 가진 신념 또한 흥미롭다. "왜 그러고 사니?"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주영은, 세상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불가피하게 기생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주영의 깨달음이 어쩌면 정말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거대하고도 탄탄히 구성된 타인의 은하계에 속해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우주를 한없이 부유하기도 하니까. 주영은 차라리 그렇게 무력하게 휩쓸릴 바에야 자신이 기댈 세계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을 내비치며 우주로 떠나버린 단 하나의 세계, 아폴로를 다시 만나기 위해 5퍼센트의 망설임도 없이 백팩을 메고 우주로 향한다.
"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결국은 각자만의 우주를 창조하거나, 찾아 떠나거나 하는 식일 테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누군가는 저 먼 알 수 없는 지구라는 푸른 별을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다 사랑에 빠져 2만 광년을 날아오느라 가난한 외계인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초록색 섬광과 함께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 않나.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로서 지켜보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참 행복해진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우리 안의 '사랑'을 건드리는 듯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 진짜 경민을 원망하던 한아도 결국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를 이해하고, 진짜 경민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인생의 가장 큰 가치를 깨닫고 온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감당하며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외계인 경민은 생을 다해 죽어가는 한아를 우주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또다시 큰 빚을 지고야 만다.
이해했다고 했지만 사실 이 중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군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아끼고, 원하는 방향으로 홀연히 떠나기도 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물어 가며 그저 순간에 최선을 다한 이들일 뿐이었다는 것 밖에는 말이다. 이들처럼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우리는 그렇게 매 순간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누구보다도 사랑받아 마땅한 각각의 존재들이다.
내 현실이 어떻든 간에 소설 속 세계가 이토록 아름답고 동화적으로 보이는 경험은 참 오랜만이라 특히 신이 났다. 조건 없이 쏟아지는 사랑, 환경을 아끼는 태도, 나를 지탱하는 우정, 내 삶을 지배하는 가치 등 아주 많은 주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재밌다.
무엇보다도 이 엉뚱하고 발랄한 로맨티시스트 외계인의 등장으로 책 읽는 시간이 조금 더 유쾌해질 것이다.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이 다정한 외계인의 위로를, 필요한 분들께 널리 널리 나누고 싶다.
[고민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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