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목소리를 내는 방법 - 아버지의 사과 편지 [도서]

글 입력 2020.09.1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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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사건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분노와 절망을 주며 계속된다. 2020년에도 마찬가지로 이와 관련한 사건들로 신문 뉴스는 가득 채워진다. 그럴 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피해자의 행실, 모습, 행태에 대한 추문과 이 사실을 폭로한 '진짜' 이유에 대한 의심의 연속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안전한 장소에서 명백한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권리와 진정성 어린 사과와 일상으로의 회복일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용서를 하고 자기 일상을 찾아가는 것. 오로지 안전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지극히도 일반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것뿐인데 사회는 이를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야하고 내고 있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친족에게 성폭력과 갖은 폭행, 가스라이팅을 당한 저자가 직접 소리를 내어 낱낱이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서 비밀스러워야 했던 이야기들을 밝힌다.

 

 

아버지의 사과편지_표1(평면띠지).jpg

 

 

 

책과 나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묻혀둔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법적 처벌도 불가하고 그의 입에서 사과를 받아낼 수도 없는 작가 이브 엔슬러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의 입을 벌리기로 한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자신이 대신 작성하는 것.

 

처음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과연 가능한가 굉장히 놀랐고 이 소설을 읽는 게 두렵게 느껴졌다. 피해자의 증언, 적나라하게 표현된 사건들을 만나는 게 개인적으로 쉽지 않게 다가온다. 평소에 그런 콘텐츠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속이 울렁거려서 힘들어 그런 것들에 눈을 감기도 했다. 그래서 더 현실을 모르게 되었고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을 때, 너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지했던 나는 충격과 깊은 실망과 혼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계속 그렇게 눈 가리고 귀 닫고 살며 현실을 회피하며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으며 최대한 신중하고 치우치지 않은 모습으로 그에 대해 알아가고자 노력하던 참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우연일까? 박원순 시장의 자살과 '공소권 없음'으로 남겨진 피해자의 이야기가 세상에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 책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제까지 이를 외면하며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순 없다는 판단의 첫 도전으로 생각보다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이브 엔슬러가 전해주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아버지와 딸


 

책임을 지지 않은 채 비밀로 묵혀둔 아버지를 작가는 자신의 앞에 세운다. 굉장히 적나라한 표현으로 아버지의 성적인 흥분이 시작된 5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지속한 여러 행위의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묘사한다. 아버지가 되어 그 행위를 정당화하지도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하며 합리화하지 않는 노력으로, 아버지의 유년 시절부터 언급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웠던 어린이, 멋 부리는 남자로 여기저기 사랑을 나누던 청년, 엔슬러가 태어나면서 된 유부남, 매몰차게 그녀를 박하는 중년,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일대기를 그린다. 최대한 딸에게 한 행위의 원인을 아버지의 내면에서 찾아 분석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결과들을 보여준다.

 

 

IMG_1983.jpg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독자인 나도 읽기 힘든 구절이 매우 많았다. 읽는 것에서조차 메스꺼움을 느끼게 하는 구절들, 상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버리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도전하며 손에 드는 것은 어려워도,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야만 그녀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성폭력, 학대, 폭행, 방임, 자해, 가스라이팅 등 독자들에게 위험이 될만한 자극적인 요소와 트리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좀 더 이 책을 읽는 것에 신중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사과 편지의 탄생과 목소리


 

독자들도 이렇게 읽는 데 힘겨운 언어와 구절들의 연속을 어떻게 해서 작가가 직접 자신의 언어로, 말로, 글로 표현을 해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쓰다 보면 그때의 감정과 기분이 벌레가 기어오르듯 다시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지금을 잘 살면 됐지 왜 더 굳이 힘든 기억을 세세하게 기억해내려고 할까, 예전에 있던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꺼냈어야 할까 질문을 던지며 작가를 이해하기보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책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들이 모두 너무나 짧았던, 어리석었던 생각임을 느끼게 된다. 여러 실제 사건들에 귀를 기울여보면, 더욱 피해자들의 흔적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녀를 포함한 모든 피해자는 현재에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지 않고 숨기고 지우려고 몇 십년 동안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된 조치와 마음의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이 되어 평생 괴롭힘당하고 있다.

 

가해자가 다시 사회에 나와 뻔하게 잘살고 있는 모습, 이유를 밝히지도, 결코 사과를 건네지도 않고 무책임으로 이 세상을 떠나버리는 죽음, 경우가 어찌 되었든 이는 모두 피해자들을 2차 가해하는 일이며 계속해서 죽이고 있는 일임이 명백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기서 언론과 수많은 눈이 가해에 동참하며 벼랑 끝에서 겨우 손바닥으로 버텨내고 있는 가해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낸다.

 

여기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다시 살아보고자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 목표는 모두 동일할 것이다. 작가는 그 방법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말이다. 온갖 폭력이 난무했던 아버지와의 기억을 기록하고 그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딸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한다. 자신도 고통스러워하고 그 고통을 준 주체가 바로 자신임을 확실히 한다.


 

오 맙소사, 이브, 이제 나는 볼 수 있다. 내가 네 안에 만들어놓은 고통스러운 림보에서, 그 무엇도, 누구도 채울 수 없는 끔찍한 외로움의 동굴 속에서, 너를 기다리는 처벌한 심연 속에서 31년을 맴돌고 있다.

 

- p.185


 

이브, 이 말을 하게 해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여기 앉아 마지막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렴. 이번에는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렴. 너의 온화함에 기대어 비틀거리게 해주렴.

... 

점령하거나 탄압하지 않게 해주렴.

... 

아버지가 되도록 해주렴. 너의 착한 마음을 네게 되비쳐 보일 수 있는 아버지가 되게 해주렴.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않게 해주렴. 똑바로 증언을 하고 함부로 무언가를 침범하지 않게 해주렴.

 

- p.186

 


 

사과 편지의 마무리와 독자

 

사건의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온갖 추문과 헛소리들은 모두 잘못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겨누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보면, 작가의 마음속에도 수 천 번, 수 만 번 자책과 '그때 이렇게 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후회의 감정이 꽂혀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진실로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벌어진 피해자의 삶의 붕괴, 고통을 헤아리는 가해자의 모습을 이 편지에 담은 것으로 생각한다.

 

진정한 가해자가 지닐 모습과 해야 할 사과가 이어지는 순간, 편지는 마무리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과의 과정을 진심으로 가해자가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피해자는 비로소 눈물을 닦고 천천히 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피해자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그들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북돋아 주는 책으로, 숨겨져 있는 가해자에게는 명백한 범죄 사실 인지와 고통의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각성의 책으로, 나처럼 아픈 현실을 맞서기 두려워 눈을 감았던 소극적 인물에게는 눈을 뜨고 진실을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나도 누군가 목소리를 내는 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으로 독자의 입장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간다. 읽는 내내 찌푸려져 있던 인상을 풀고 이제 아픈 소식에 눈 감고 귀 닫지 않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은 채 그들이 내는 목소리 바로 앞에 함께 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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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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