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Epilogue. 불신자의 순례 - 칼릴 지브란, 예언자 7 [문학]

23장, 기도에 대하여 / 26장, 종교에 대하여 / 최종장, 고별
글 입력 2020.06.2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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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이다. 지브란의 ‘예언자’를 따라 호흡하며, 걸어보기로 한 것이 벌써 마지막에 닿다니, 나 혼자 아쉼이 깊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느끼고 사유하였는지를, 지금 나조차도 분명히 이렇다 말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엇을 쓰려 했던 것이고, 무엇을 그래서 써낸 것일까.

 

마지막 장은 ‘기도와 종교’.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그의 글에서는 그럴법한 마지막이다. 불신자인 내가 그의 신앙을, 지브란의, 지브란만의 신앙을 따라 걸었다. 나는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며, 이 길을 따라 왔을까. 그것은, 종교 자체가 아닌 종교성. 내가 믿는바, 우리 모두가 내재하고 있는 종교성에 대한 나의 궁리였다. 취한 것은 종교의 가치, 버린 것은 종교에 대한 맹목이다. 내가 불신자인 탓이요, 또한 조금 떨어져 바라보길 원했던 까닭이다.

 

기독 교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제1 전제인 ‘전능하신 주 예수의 존재하심’을 받아들여야 할 터이다. 나는 그 제1 전제를 거부한다. 그것은 의식이 아닌 마음의 일, 즉 믿지 않음이 아닌 믿어지지 않음. 그를 거부하고서 나는 ‘그’의 말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말, 그리고 ‘그’를 믿는 그 숱한 자식과 자식들의 말을 접해보았다. 그러면 그 안에, 무언가 동일한 마음이 있음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며, 예기하게 된다. 인간의 시대 내내 이 숱한 종교들이 배타적으로 구획화된 채 저마다의 영토를 가로 잡아 있음이란, 내겐 다만 그 모든 인간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였음이라 읽힌다. 또한 그보다 먼저 내가, 그를 원해도 보았던 까닭이다. 이 공통된 우리 마음이 내게는, 아직 모호한 그 언어 종교성으로 화해 나온다.

 

종교를 바라는 마음이 서고, 종교를 찾아 나서고, 그러나 내 혼이 끼일 넉넉한 자리 하나를, 드디어 마음을 탁하니 놓아 쉬일 처소와 모든 번뇌를 물리칠 신비한 예배당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어떠할 것이냐. 이것은 나의 나에 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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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한 늙은 사제가 말하기를, 

저희에게 종교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내 오늘 그것 외에 다른 무엇에 대해 말했던가? 

일체의 행위, 일체의 명상이 종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지만 두 손이 돌을 쪼고 베틀을 손질하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언제나 샘솟는 경이와 경탄이 없다면 그것은 행위도, 명상도 아닌 것. 

누가 과연 행위와 신앙을, 직업과 신념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자기의 시간을 자기 앞에 펼쳐 놓으며, `이것은 신을 위해,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 또 이것은 내 영혼을 위해, 이것은 내 육체를 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그대들의 시간이란 자아에서 자아로 허공을 퍼덕이며 나는 날개이다. 다만 최고급 옷으로써만 도덕을 지니려는 이, 그런 이는 차라리 벌거벗는 게 나을 것. 바람과 햇빛도 그의 살엔 어떠한 구멍도 뚫을 수 없으리라. 

자기의 행위를 도덕에 의해서만 정의 내리려는 이, 그런 이는 노래하는 자기의 새를 새장 속에 가두는 것. 지극히 자유로운 노래란 막대기나 철사줄 사이로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열렸다가도 곧 닫히는 창(窓)처럼 예배 드리는 이, 그런 이는 아직 제 영혼의 집엔 가 보지 못한 이다. 새벽에서 새벽으로 창이 열리는 영혼의 집에. 

 

그대들 나날의 삶이야말로 그대들의 사원이며 종교인 것. 그곳으로 갈 때마다 그대들, 그대들의 전부를 가지고 가라. 쟁기와 풀무, 망치와 피리. 필요해서건, 다만 기쁨을 위해서건 그대들이 만들었던 모든 물건들도 가지고 가라. 왜냐하면 그대들 환상 속에서도 그대들이 이룬 이상 오를 수도 없고, 그대들의 실패 이하로 떨어질 수도 없기에. 

또 함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가기를. 왜냐하면 그대들 찬미 속에서도 그들의 희망보다 높이 날 수 없으며, 그들의 절망 이하로 스스로를 낮출 수도 없을 것이기에. 

 

그대들 만약 신을 알고자 한다면, 수수께끼의 풀이자가 되려 하지 말라. 차라리 그대들의 주위를 둘러 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그분이 그대들의 아이들과 놀고 계심을 보리라. 또 허공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그분이 구름 속을 거니시며 번개 속에 팔을 뻗고 비로 내리고 계심을 보게 되리라. 그대들은 또 그분이 꽃 속에서 미소 지으시다가 이윽고 일어나 나무들 사이로 손을 흔드심도 보게 되리라.

 

이 모두가 거기에 함께 있음을, 그대는 보게 되리라.


- 칼릴 지브란, 예언자, 26장. 종교에 대하여



저희에게 종교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내 오늘 그것 외에 다른 무엇에 대해 말했던가?

일체의 행위, 일체의 명상이 종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이제 또한 알아듣겠는 것이다. 종교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반드시 이름을 가진 어떤 일체의 것에 안기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종교란 스스로 하나의 도구. 그 도구의 필요와 쓸모란 인간의 ‘충만’에 가로놓여 있고, 그 도구를 잡고서 행할 수가 있고 행하고자 하게 되는 우리들의 일이란 ‘나아감’일 것이다. 나는 그 나아감, 그렇게 나아간 곳에 도달한 우리의 모습에 어떤 적합한 비유가 있을지 골몰해보다간, 일찍이 신의 최후를 고한 이의 말씀인 ‘초인’을 떠올린다. 신 없는 시대에 종교성만을 가진 이인 내가, 택하게 될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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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이기에. 

차라투스트라의 그 말처럼, 

인간이 영영 극복되어야 할, 

체화된 숙제로서의 존재였기에. 


하지만 두 손이 돌을 쪼고 베틀을 손질하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언제나 샘솟는 경이와 경탄이 없다면 그것은 행위도, 명상도 아닌 것. 


누가 과연 행위와 신앙을, 직업과 신념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자기의 시간을 자기 앞에 펼쳐 놓으며, `이것은 신을 위해,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 또 이것은 내 영혼을 위해, 이것은 내 육체를 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두 손으로 무언가를 빚고 있더라도, 어떠한 의식과 마음 없이는 그 행위가 다만 무엇이냐는, 오랜 질문이 떠오른다. 어찌 우리 전 시간 속을 의식 충만히 살아낼 수야 있을까마는, 그것이 불가하듯 온 시간 속을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낼 수도 없을 일이리다. 의식 없이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빚어내는 일. 우리는 저 말이 안길 실례를 익히 알고 있다. ‘모던 타임즈’에서 통렬히 지적되었고, 그 후 내내 우리에게 두려운 것으로 이따금 떠오르는 것인, 스스로 목적 잃은 행위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문제.

 

우리 행하고 또 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반드시처럼 우리의 바람에 합치되는 일이 될 수야 있을까. 그로써 전적으로 영혼의 일이 될 수야 있을까. 가까운 소망인 바램으로부터 먼 소망인 꿈까지, 각각의 소망이 이 안에 있고, 그 소망을 실현시키는 도정으로써 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충만한 행위요, 의식 속의 행위 됨이요, 즉 영혼의 직조가 될 것이나, 또한 우리의 살아가는 지금에 그 온통 충만함이란 뜬구름 같은 말로 들려올 것을 익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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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아무런 의식도 없이 온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바히 못 되기에. 또한 우리가, 언제나 손으로 무언가를 빚어내야 살겠는 존재이기에. 제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동물인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 사고함으로 살아가고, 무언가 빚어냄으로 살아내고, 그로써 자아를 유지하며 살지 않았나.

 

두려운 것은 언제나 익숙해져 가는 일. 우리가 또한 모르는 새에 모든 일에 대해 익숙해짐으로, 또 그것을 귀치 않은 것으로 여기는 동시에, 권태가 우리의 손과 그 손이 이어진 마음을 하나의 기계로 화해가고 있었음에. 우리는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이 심연과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건져 올려야만 하는 존재. 즉, 스스로를 구원해내야만 하는 모순적 존재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사제가 말하기를, 

기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대답해 말하기를,

 

그대들은 괴로울 때에만, 

또 필요할 때에만 기도하고 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기쁨이 충만할 때에도, 

나날이 풍성할 때에도 기도하길. 

 

왜냐하면 기도란 진정 무엇인가. 

생명의 하늘 속에 그대들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안락을 위해 허공에 그대들의 어둠을 쏟아 버림은 또한 기쁨을 위해 그대들 가슴의 새벽빛을 쏟아 내는 것. 그리하여 영혼이 그대들을 기도하라 부를 때 그대들 울지 않을 수 없다면 기도는 다시, 비록 울고 있을지라도 또다시 그대들을 격려하리라. 기어이 웃음에 이를 때까지. 

 

기도할 때면 그대들은, 바로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는 무수한 이들을 만나기 위해 허공에 일어서야 한다. 기도 속에서가 아니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사원으로의 그대들의 방문을, 황홀과 달콤한 영교(靈交)를 위함 외엔 아무 뜻도 없이 하라. 


왜냐하면 그대들 비록 구하는 것 외엔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기에. 또한 다만 겸양하고자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 결코 구원될 수 없을 것이기에. 또한 그대들 심지어 타인의 행복을 빌기 위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보이지 않는 사원으로 들어감, 그것으로 충분할 뿐.

 

 

내 그대들에게 가르칠 순 없다,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신은 결코 그대들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 법, 다만 그분 스스로 그대들의 입술을 시켜 말씀하실 뿐. 그러므로 내 그대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무수한 바다와 숲과 산의 기도를.

다만 그대들이, 산과 숲과 바다에서 태어난 그대들만이 가슴속에서 그들의 기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을. 그리하여 만약 그대들 한밤중의 고요에 귀기울이기만 한다면, 그대들은 침묵 속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리라. 

 

 

`신이여, 날개 달린 저희의 자아여, 

명하는 것은 저희 안의 당신 뜻이 명하는 것이옵니다. 욕망함은 저희 안 당신의 욕망이옵니다. 당신 것인 저희의 밤을 역시 당신 것인 낮으로 변하게 하는 것, 그것도 저희 안 당신의 강한 충동이옵니다. 저희는 당신께 아무것도 청할 수가 없습니다. 안에 욕구가 생기기도 전에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시기에. 

 

저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더욱 주심으로써 당신은 저희에게 일체를 주시옵니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23장. 기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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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괴로울 때에만,

또 필요할 때에만 기도하고 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기쁨이 충만할 때에도,

나날이 풍성할 때에도 기도하기를.

 

왜냐하면 기도란 진정 무엇인가.

생명의 하늘 속에 그대들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기도란 무엇인가. 종교가 신앙의 대상과 그에 대한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앞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내 기이한 생각 하나를 늘어뜨렸다. 그 종교는 내게 어떻게 발하고 행해지는가 하면 역시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종교를 실현시키는 하나의 능동적 행위. 기도로써 이루어지는 일일 것이다, 신앙이란.

 

기도는 반드시, 경전을 가지고 ‘높으신 당신’을 향해야 하는가. 내게는 얼굴을 가진 신이 없다. 내 언제나 정신을 가로모아 집중해 상상으로써 내가 그에 닿고, 무언가를 느낀 다음 다시 여기 현재로 돌아올 때에, 즉 이 기도의 때에 닿는 것은 내 생애의 끝에 놓인 더 높은 나, 가정된 초인으로서의 나였고 또한 즉, 운명에 대함이었다. 그것이 ‘신’은 아닐 것이다.

 

그 기도란 진정 무엇인가. 온 생명의 하늘 속으로 나를 드올려, 화알짝 펴내는 것. 내적 감관의 스코프를 드넓혀, 비로소 볼 수 ‘없는’ 것을 추찰하던 나는, 상상의 영역을 돌아 나올 제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오롯 눈에 담는다. 참으로 기이한 어울림이다. 그것은 거기 무수히 있던 풀꽃들이고, 그 풀꽃들을 뒤흔드는 바람의 거기 있음이고, 무수히 많은 구름의 세세 경계이며, 하늘색으로 일축하던 하늘의 보다 자세한 색깔이며, 그리고 이 전체를 아우르는 것. 이 전체에서부터 내게로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자, 저 전체로부터 내게 수렴해 들어올 때 내가 갖게 되는 어떤 생각, 생명과 순환의 인과율에 대함이다. 저도 몰래 얹어져 내게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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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대들 비록 구하는 것 외엔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기에. 또한 다만 겸양하고자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 결코 구원될 수 없을 것이기에. 또한 그대들 심지어 타인의 행복을 빌기 위해 들어간다 해도 그대들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이 구절을 참으로 좋아라 한다. 내 아는 몇 가까운 신앙인들이 올리는 기도란, 더 나은 무언가, 곧 자신의 영달을 축원하는 일에 가까웠음에. 그러나 또한 어떤 독실한 이가 올리는 기도는 신의 찬미 그 자체였고, 어떤 이의 기도는 그저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더라. 기도가 무언가 영달을 위함이라면 그에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음을 우리가 안다. 신비에 기대어 무언가 내적인 변화, 고양감과 겸양을 얻어내고자 하여도 그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우리가 안다.

 

기도는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행위이자 수단이 아닌, 고요히 침묵하는 일. 그것은 내게 명상이다. 고요한 침묵과 명상 속에서 비로소 입 다문 내 시끄러운 정신이 하나의 머언 상상으로 날아들어 가는 것. 돌아올 때에 바뀌는 것이라곤 하나 없다. 그 바뀌는 것이랄게, 무언가 관측할 수 있는 단단한 것이 되었건, 심지어는 잡을 수 없는 것이자 형체가 없는 것인 내 내적 변모가 되었건 말이다.

 

기도는 무언가를 갖게끔 하는 수단이 아닌, 그저 침잠하고 집중하여 의식을 전개하는 일. 얻고자 하는 것이 심지어 내 권속 안의 것으로 여겨지는, 나의 내면에 대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고자는 마음만으로는, 아무리 독실하고 여실하며 열렬한들 불가함을 우리가 안다. 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건 간,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청자가 아니었기에. 거기 청자이자 소원을 이루어 줄 이가 없다면은, 그리하여 그가 그런 권능을 가졌다 한들 나의 생에 분명한 신의 손과 표지로써 내려지는 기적이 여기 없다면은, 기도란 다시 무엇이 되는가. 기도란 무언가 하늘에서 왕림할 빛의 선물을 위함이 아닌, 보다 깊은 집중을 위함이었다. 그에서 돌아 나올 때, 내 안에 상쾌한 바람이 부는 것을 내 느낌이란 깊은 집중을 통해 유도된, 나의 더욱 넓어진 감관의 반증, 그뿐일 것이다.



 

고별




잘 있거라, 그대들, 오르팰레즈의 사람들이여. 날은 끝났다. 마치 내일을 향해 눈 감는 수련(睡蓮)처럼 날은 우리들 위로 눈 감는다. 우리 여기서 얻은 것, 그것을 우리는 간직하게 되리. 만약 그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그러면 우린 다시 와서 함께 시혜자에게 손을 내밀어야만 하리라. 

잊지 말라, 내 그대들에게 돌아오게 될 것을. 잠깐, 그러면 내 갈망은 먼지와 거품을 모두어 다른 몸을 이루게 되리라. 잠깐, 바람 위에 일순 휴식이 오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안녕, 그대들이여. 또 내 함께 보낸 청춘이여. 

우리 꿈길에서 만났던 것도 다만 어제 일. 내 고독할 때 그대들은 내게 노래 불러 주었고, 그대들이 갈망하여 난 하늘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잠은 사라지고 꿈도 끝났다. 새벽도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한낮이 닥쳐와 우리 희미하던 잠은 완전히 깨어 버렸으니, 이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다시 함께 이야기하고, 그대들은 내게 더 그윽한 노래를 불러 주게 되리라. 그리하여 만약 우리 두 손이 또 다른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린 하늘에 또 하나의 탑을 세우게 되리라. 

 

이렇게 말하며 그가 선원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곧 닻을 걷어 올리고 정박지로부터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울음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듯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리고 울음소리는 황혼 사이로 떠놀라 마치 거대한 나팔소리처럼 바다 위로 울려 퍼져갔다. 

다만 알미트라만이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그리고 사람들 모두 흩어질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홀로 방파제 위에 서 있었다. 가슴속 깊이 그의 말을 기억하면서.

 

`잠깐, 바람 위에 일순 휴식이 오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최종장. 고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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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내 걸을 길이 마쳤다.

 

나는 무엇을 썼고,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도 쏘아나가려는 듯 영혼의 그릇 경계를 넘실대며, 불길하고도 유쾌하게 끓어오르던 ‘나의 것’들이다. 그것은 파편. 결코 모여 하나의 원을 이룰 수는 없을, 그러므로 영원한 파편일 것이니, 나는 이제 길을 마치고, 이 길의 끝 작별의 순간을 무엇으로 마감할지가 영영 어렵다. 다음, 언젠가 내가 다시 이 백지로 돌아올 적엔 보다 아름다운 것을 안고 돌아오겠다는 나 혼자 다짐 밖에는.

 

쓴 것을 모조리 돌이켜 본다. 하나의 맥으로 꿰어낼 수 없는, 종잡을 수 없는 사고의 뭉치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 나만 알아볼 수 있을 하나의 소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나의 ‘충만’과 ‘나아감’.

 

나아감은 영원한 것. 불신자의 순례를 마친다. 그것은 종료로서의 마침이라기보다는 다시금, 더 깊은 언어를 가질 때까지의 내 칩거와 고독을, 그로써 더 깊은 것으로의 내 침잠과 숙고를 뜻하다. 아직 내가 닿지 못하였고, 갖지 못하였으므로. 내 언어는 아직인 따름이다. 영원히 아직일 너와 나 우리의 사정을 알겠기에, 그러므로 이렇듯 떠나고 돌아오는 일의 반복이란 당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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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장을 대체로 받아들이지만, ‘당신’의 개념 하나를 거부했다. 내 안에서 그 ‘당신’, 곧 타자화된 신은 형상화되지 않았기에. 나는 이렇듯 뿌리 깊은 불신자요, 그럼에도 그를 듣는 자이다.

 

나아감을 위한 충만함, 그 충만함을 위한 기도. 기도는 결국 나의 나아감을 위한 행위. 그렇다면 그 기도를 바칠 대상이 반드시 위대한 존재, 혹은 인간 너머의 존재여야만 하겠는가. 그 질문을 대하는 나는 너무도 고집스러워, 내 기도가 기꺼울 나만의 당신을 찾고 떠올리고자 해왔다.

 

내게 그 당신은 “내가 까닭도 없이 꽃을 꺾어 드릴 당신”, “우리 고독마저 화음으로 만들 내 평안과 평화일 당신”, 그렇게 “나와 줄기를 얽어 푸른 향기를 뿜는 과수원의 뿌리가 되실 당신”. 그를 찾으며, 그 도정 위에서 나는 기쁨과 슬픔을, 자유와 쾌락을 자꾸만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보니, 내게도 사랑 하나가 찾는다. 이 사랑은 나의 당신일까. 다음의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나는 그 대답을 찾고 떠올리고 알아가고, 아마 깨달아갈 것이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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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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