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에 실린 부스러진 사랑의 기억들 - 김봉곤 '시절과 기분' [도서]

글 입력 2020.05.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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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어떤 향은 어떤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어떤 온도, 어떤 바람의 세기, 몸을 누르는 어떤 무게, 어떤 시간을 가진 저마다의 향들이 있다. 저녁에 산책을 하다가,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유난히 쨍한 아침에나, 갑자기 기시감이 밀어닥치며 잊고 지냈다고 생각한 나의 시절들을 함께한 사람들이 생각난다. 여름에는 유난히 그렇다. 한층 따뜻해진 날씨에 오만가지 향들이 섞여 하루종일 코끝을 간질이면, 또 하루종일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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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Beach (study)」, oil on panel, 40 x 32 cm.

 

 

여름하면 떠오르는 작가 김봉곤이다. 그의 소설이라면 단편 「여름, 스피드」(2017) 밖에 읽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에 이번 신간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뭐랄까, 「여름, 스피드」는 너무 열정적이라 생각했다. 아니, 대체 사랑이 뭐라고, 지나고 나면 다 형체 없이 사라질 사랑이 뭐라고 대체 이리도 끈적하고 온 몸을 내던져 사랑하려 하나. 난 이 뜨거운 열정의 온도에 맞지 않다며. 온 세상의 비극적 사랑은 다 겪은 듯 제대로 비뚤어진 당시 나의 상태도 아무튼 김봉곤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출간된 『시절과 기분』의 표지를 보자니 도저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단행본 『여름, 스피드』2018)의 표지에서부터 이어진 헨리 스콧 튜크(Henry Scott Tuke)가 그린 유화의 살아있는 듯한 붓터치하며, 싱그러운 연두색이며, 반듯하게 조용히 자리잡은 아이보리색 제목하며. 손에 꼽을 정도로 예쁜 표지였다. 그의 여름은 여전히 정열적일까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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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그는 여름이 가진 잡다하고 풍부한 향을 모두 잡아내는 작가였다. 또 사랑 타령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안 그런 척, 한껏 객관적인 척 소설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지만, 하나하나 사람 마음을 참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차라리 아예 상대에게 좋아 죽고, 사랑에 미친 인물들을 그렸다면 ‘이번에도 열정적이네’라고 비관할 수 있을텐데. 이번 소설에서 그는 실패한 지난 사랑의 흔적들을 털어놓는다. 말 그대로 ‘실패한’ 사랑들로 가득하다.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절대로. 우리의 구연애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듯이.


이별했음에도 혼자 차마 끝내지 못하고 사랑도 있고(「엔드 게임」, 「마이 리틀 러버」), 모든 연애가 흔히 로맨스에서 보이는 둘도 없는 사랑으로 곧바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시절과 기분」, 「그런 생활」). 이런 걸 연애라고 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폭력적인 관계도 있고(「데이 포 나이트」), 사랑의 원형이 되어 오랜 시간 그림자처럼 ‘나’의 일부가 되어 남아있는 사랑도 있다(「나의 여름 사람에게」).


늦여름의 향기는 수명을 다해가던 시기의 사랑의 기억을 건드리고(「엔드 게임」), 비가 쏟아지던 날 관계 속에서 명백한 약자임을 확인 받는 순간을(「데이 포 나이트」), 태풍과 장마가 지나가고 끓어오르는 여름이 시작되던 순간에 “처음 사랑했던 남자”를 생각하며 다시금 새로운 사람과 강렬한 사랑에 빠지고 싶어하는 ‘나’가 느끼는 풍부한 계절의 향 속에서(「나의 여름 사람에게」), 그리도 부정했건만 나는 자연스레 사랑이라는 감정에 또 다시 푹 젖을 수밖에 없게 된다.

 

 

 

1. 「데이 포 나이트」: 그러한 사랑은 나를 변화시킬 자격이 없다.


 

「데이 포 나이트」에서는 대학 시절 ‘종인 선배’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의 폭력까지 감수해가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나’의 이야기와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현재의 ‘나’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있다. 아프다 못해 화가 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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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Young Sailor」, oil on panel, 35.8 x 26 cm.

 


늦깍이 대학생으로 막 입학했을 무렵, ’나’는 ‘종인 선배’에게 완전히 반해버리고 만다. 반해도 제대로 반했다. ‘나’는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고까지 느낀다.


그러나 종인 선배는 ‘나’의 이 호감을 소중히 여기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쳐내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성적 욕망과, 술주사로 나오는 폭력을 받아주는 대상으로서 ‘나’를 대할 뿐이다. 그러나 맨정신일 때 그는 스스로 게이가 아니라며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마저 좋다. 맞아도 좋고, 너무 아프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깨물려도 좋다. 그가 부르면 달려가고, 때리면 맞는다. 뭐든 좋다. “그의 위협보다 내 거절이 그를 유혹하지 못하는 행동이 될까” 두렵다(82).

 

 

흐린 날씨었다고 기억한다. 얼얼한 뺨을 매만지면서도 웃었다,고 기억한다. 곱씹어보면서 그럼에도 나는 기뻤다,고 기억한다. (74)

 

 

역시나 그가 불러서 한달음에 달려간 어느 비 내리는 날, ‘나’는 짐짓 가벼운 척 선배에게 고백한다. 선배는 말한다. “니가 나를 존나 꼬셔봐.”(77) 이 한마디는 이들 간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난 가만히 있을 테니 네가 와봐라, 그러나 나는 장담 못한다. 심지어 비속어까지 섞인 이 한 문장에서 ‘종인 선배’의 무책임함과 ‘나’에 대한 멸시와 무시가 터져나온다.


이 세상에 연애라고 퉁쳐지는 수많은 관계들 중에는 실제로 얼마나 폭력적인 것들이 많은가.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랑이라 생각하는 감정에 빠져버려, 혹은 사랑'이어야' 하는 감정에 빠져버려 끊어내지 못한 채 스스로를 그 말도 안되는 관계 속에 던져넣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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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Boy Against Rock」, watercolor, 14 x 21 cm.

 

 

이 관계가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쨌거나 그가 좋다.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고통 속에 빠뜨렸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리고, 분하고, 눈물이 날 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데이 포 나이트」를 읽으면서 여러 번 울컥했다. 다행히도 그 관계에서 빠져나온 소설 속 ‘나’와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한다.


관계를 빠져나온 후에 우리는 그 기억이 뺨을 후려치듯 우리에게 남기고 간 상처를 본다. 수치스럽고, 역겹고, 혹은 그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저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랑이어서는 안된다. 그때 유일했던 사랑이었대도, 지금은 아니어도 된다.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 하지만, 아니, 그 사랑은 지금의 나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았다.


소설 속 ‘나’는 ‘종인 선배’와 얽힌 기억을 “유의미한 변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나’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그곳에는 H선생님도, 종인 선배도, 나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도, 착각의 여지도 없었고 나는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87). 애써 그것을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으로 만들 필요 없다. 우리는 그 사랑의 기억을 홀로 아로새기지 않아도, 지워도 된다. 그것은 회피가 아니다. 그러한 사랑은 나를 변화시킬 자격이 없다.

 

 

 

2. 「나의 여름 사람에게」: 어떤 사랑의 원형


 

「나의 여름 사람에게」에서는 ‘나’가 “처음 사랑했던 남자”인 ‘A형’과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와, 그와 헤어지고 나서 어느덧 그의 나이가 된 ‘나’가 ‘창준’이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그와 사귈지 말지 고민하는 시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이별도, 가슴 아픈 이야기도 없다. 그러니까, 아직 없다. 오로지 시작만 있을 뿐이다. 다만 생략된 이야기 속에 그렇게나 강렬했던 첫사랑과 헤어진 뒤 훌쩍 흐른 10년이라는 시간과, 관계를 시작함에 있어 달라진 ‘나’의 열정의 온도가 보이기에 조금은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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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The Bathing Place」, oil on board, 39 x 28 cm.

 

 

2009년 2월, 모임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나’와 ‘A형’은 곧바로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고 그날 밤 곧바로 연인이 된다. ‘A형’은 ‘나’가 처음 사랑했던 남자였고, ‘나’는 ‘A형’과의 만남에서 “에로틱함이나 흥분을 넘어 어떻게 표현할 길 없는 순수한 기쁨”(114)을 느낀다. “그를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게 될지도”(121) 모른다는 ‘나’의 예감은 어떤 의미로는 적중하고야 만다.


‘A형’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여럿 만나는 동안에도, 그리고 어느덧 10년이 지나 시덥잖은 이유로 연인이 되는 것을 자꾸 미루는 ‘창준’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A형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인정하고야 만다. 이후 ‘나’에게 찾아온 사랑의 모든 본보기이자 비교 대상이 되는, 사랑의 결정체이자 원형은 바로 10년 전 ‘A형’과의 기억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A형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실패한 첫사랑의 여흥을 다시 한번 음미하려 하고, (중략) 앞으로 내가 만날 모든 사람이 이미 A형 안에 다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인지 예정일지 모를 생각에 그만 다 집어치우고도 싶어졌다. (93)

 

 

만남부터 헤어짐 이후까지 느끼게 되는 온갖 세세한 감정이나 갈등의 상황, 서로 간에 나누는 애정 표현들은 사실 얼추 비슷해보이는 것이 많아서, 사랑은 어쩌면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일지도 모른다. 그 반복과 변주의 시작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누군가와의 기억이 있다. 어떤 사랑은 이후 누군가에의 인생에 있어 사랑의 원형이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말할 때, 자연스레 떠올리는 기억으로 남는다. (물론,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경험임에도, 우리는 이따금 또 다시 ‘그러한 ‘사랑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내가 가진 사랑의 기억은 모두 그와의 그 시절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 때와 같은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사람와 같은 사람은 결코 없으며, 그때의 사랑과 완전히 같은 사랑 역시 있을 수 없다. 기억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 시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이후의 사랑이 실패하면서 역시 그 사랑만이 진짜이며,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없으리라고 체념하기를 반복한다. 그 결과, 딱지이든 그림자이든 무엇이든 간에, ‘A형’이 ‘나’에게 남긴 그것은 10년이란 세월 동안 눌러 붙으면 더 눌러 붙었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우리는 ‘이번엔 혹시?’라는 얄팍한 기대로, 이번엔 어쩌면 나에게 눌러붙은 그 시절에 버금가는 새로운 사랑이 정말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바보같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여름 사람에게」 속 ’나’ 역시 좌절과 체념의 반복하던 그 끝에서, ‘강렬한’ 사랑이 어쩌면 또 다시 찾아올 지도 모른다고 바보같지만 또 한 번 기대를 건다. 또 한 번 여름을 겪기를, 비록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끓어 날아가고 부풀어오를 당신과 나’”를 기대하며 ‘창준’을 만나기로 한다. ‘나’는 말한다. “태풍도 장마도 다 지나간 진짜 여름, 끓어 날아가고 부풀어오를 당신과 나, 그것이 오해나 착각으로 가득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무엇보다 당신을 실-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3. 「엔드 게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엔드 게임」은 ‘나’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형섭’에 대한 이야기이다.(「엔드 게임」에서는 ‘형섭’으로 등장하고, 「마이 리틀 러버」에서는 ‘H’로 등장한다. 이 둘은 동일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헤어진지 오래다. ‘형섭’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에 대한 글을 ‘근사히 끝마치기로’ 마음 먹고 ‘형섭’과의 기억들과 현재 그와의 관계를 되짚는다. 행복했던 시기의 기억도 있지만, 나’의 기억은 주로 이별에 다다르던 시기의 기억과 헤어졌음에도 차마 헤어지지 못하던 시기, 곧 현재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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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Back of a Boy Bather」, oil on canvasboard, 25 x 18 cm.



‘나’에게 ‘형섭’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자, 가장 소중했지만 잃어버리고야 만 사람이다. 둘은 오랜 시간 같이 살고 말투마저 닮아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다. ‘형섭’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후에도 그들은 반 년을 더 살고, 헤어진 후에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이가 되어 만남을 이어간다. ‘나’는 아직 ‘형섭’을 놓지 못한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지 잃고 싶지 않아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나’ 역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나를 다시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현재의 시선에서 그와의 일들을 복기하고, 그때는 차마 괴로워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들을 어쨌거나 글을 써내려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다시금 설명해보려 한다.


 

“쿠마가 너무너무 불쌍해.”

되도 않는 말을 하면서. (중략) 나조차 명쾌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울었는데 어쩌면 그가 내게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울었던 마음도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도저히 설명되지도 납득되지도 않는 그런 이유, 비의 같은 건 없이, 어쩌면 의미도 없이, 그런 건 아니었을까 이제 와 생각해본다. (145)

 


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형섭’과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더 이상 문학과 ‘형섭’을 서로 엉킨 채 두지 않고,  이 글을 완성함으로써 소설에서나마 ‘형섭’과의 사랑을 나름대로 정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 속에서 규명하지 못한 ‘형섭’과의 사랑을 소설을 통해 자꾸만 파헤치던 ‘나’는, 이제 소설 속에서나마 끝을 냄으로써 형섭과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자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의 결말도 미리 생각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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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Scott Tuke, 「Sea-pinks」, oil on canvasboard, 14.5 x 24 cm.



그러나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내던 ‘나’는 고백한다. 그 시도는 실패했음을. ‘형섭’을 정리하고 싶다 해도 그와의 사랑을 어떠한 결말에 맞춰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소설과 삶을 분리시킨 채 끝내 정리되지 않는 이 사랑의 기억을 일단 소설 속에서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소설 속에서 형섭과 끝을 내기로 했는데, 그렇게 해야하는데 ‘나’는 문득 깨닫는다.

 

 

휘갈기듯 바로 앞의 챕터를 쓰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처음으로 그에게 이별을 선고받았을 때처럼, 그가 내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 완전히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중략)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손쓸 도리 없이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157-158)

 

 

‘나’는 ‘형섭과 “연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지나, 점차로 친구라는 사실조차 희미해져 갈 것”(156)을 거부한다. 그는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고, 부끄러움에 지지 않을것이라 말하며 “마지막.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형섭’과의 사랑을 제대로 써내려가기를 시도한다.(159) 다시 한번 그의 시간 속에서, 그의 시간 속 ‘형섭’을 만나고 싶어한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어떤 이해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는 사랑을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을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150). 그렇게 지난 사랑을 비로소 완성시키고 나면, 또 다시 사랑에 빠져 이 계절을 앓을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


작가의 말대로 “여름처럼 매일이 제각각이고 제멋대로인 날씨도 없을” 것이다(97). 그러나 한편 여름은 “매한가지로 더웠기에” 지난 날의 아린 사랑들을 한번쯤 헤집어 보기에도, 새로운 사랑에 흠뻑 빠질 준비를 하기에도 제격이다. 굳이 그럴 의향이 없다거나, 추억할 만한 사랑이 없다면 『시절과 기분』을 읽으면서 계절을 제대로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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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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