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12. 가난해서 꿈조차 가난해야 하는 우리

글 입력 2019.12.3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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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난해서 꿈조차 가난해야 하는 우리


 

초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나눠주는 순간이 제일 싫었다. 번호순대로 이름이 불리면 아이들은 차례대로 나와 그 종이를 받았는데, 기분 나쁘게 하필 내 순서만 건너 뛰어지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왜 나는 저 종이를 받을 수 없을까, 저 종이에 대체 뭐가 적혀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몇 년이나 지난 뒤에야 그 종이는 고지서였고, 내가 납부대상에서 제외되어 그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기초생활수급자는 국가 기준에서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2000년 10월부터 생계, 주거, 의료, 교육 네 분야에 걸쳐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계층이다.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여러 납부의 의무에서 제외되기도 했고 무료로 식료품을 받기도 했다.

 

복지의 개념을 이해하자 하얀 종이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때 내게 복지는 혜택이었다. 집으로 오는 식료품은 맛있었고,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반가웠다. 그때의 나는 내가 선택받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존재라서 ‘무료’라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 집은 복지의 수혜자였고, 나는 그 사실이 감사하기만 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통장 잔고라는 걸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고등학교 땐 기숙학교에서 간단하게 숙식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낯선 땅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집에 손 벌리긴 부끄럽고, 안정적인 직장은 없는 학생 신분에서 틈틈이 했던 아르바이트 월급은 모두 생활비로 빠져나갔다.

 

학점, 스펙, 생활비, 불안한 미래 등 많은 것이 대학생을 힘들게 한다. 만약 거기에 등록금의 부담까지 더해졌다면 나는 이 험난한 대학 생활을 절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소득분위의 영향으로 대학교 4년 내내 전액에 가까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 역시 신기하고 고맙기만 했다. 등록금 문제로 힘들어하는 학우들을 보며 나 홀로 과분한 혜택을 받고 있다는 미안함도 들었다. 그런데 그 미안함은 친구와 대화를 나눴던 그 순간, 찝찝함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대화는 ‘어떻게 등록금을 충당하느냐’ 라는 다소 갑작스러운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자리엔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이 있었다. 다른 아이가 부모님이 내주신다고 답했고, 다음 차례인 나는 머뭇거리며 장학금으로 충당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설마 전액이냐는 놀라움 섞인 질문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답하자 질문을 던진 아이로부터 여태 한 번도 받지 못했던 부러움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내가 그런 부러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급하게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나의 사정을 밝혔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장학금에 대한 부러움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집안 사정이 넉넉해도 등록금을 내달라고 하는 건 미안한 문제라고, 성적보다 소득분위가 장학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불공평하다는 말을 쏟아냈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그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너무 화나는데 화를 내도 되냐고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서 내 질문에 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한 분노는 속에서 삭여질 뿐이었다.

 

그땐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아이도 평범한 학생이니까 등록금이 크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라고, 복지를 받는 사람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한 말이니까 넘어가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장학금을 신청할 때마다, 아르바이트에 치일 때마다 그 아이의 철없는 부러움이 떠올라 기분을 심란하게 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등록금을 내는 게 부담스러운 것과 불가능한 것의 차이를 아냐고, 나는 복지 대신 용돈을 받는 게 더 부럽다고, 끼니 걱정 안 하고 생활비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기분이 뭔지 느껴보고 싶다고.

 

어느 날 웹 서핑을 하다가 인터넷에서 친구와 같은 말을 하는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소득분위의 산정이 정확하지 않다는 불만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집안 사정 힘든 건 마찬가진데 왜 우리 집은 혜택의 대상이 아니냐는 한탄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낮은 소득분위로 여러 혜택을 챙긴 친구가 잘만 먹고 다닌다는 비난은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기초생활수급자가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고민했다.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니까 밥 한 끼 제대로 챙기지 못할 만큼 비참해야 하는 사람? 어렵지도 않으면서 복지 혜택을 가져가는 얌체 같은 사람? 실체는 둘 다 아니다. 우리에게도 끼니는 때울 만큼의 자립심은 있다. 그러나 그 자립심은 정부의 도움 없이 이 험난한 세상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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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아주 좋아한다. 이미 아트인사이트에 몇 차례 관련 글을 기고했을 정도이다. 이유를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빈곤에 대해 이 영화만큼 현실적으로 다룬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무니는 젊은 엄마 핼리와 디즈니 주변 싸구려 모텔에서 살아가는 6살짜리 꼬마다.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아가던 두 모녀는 정부에게서 받는 보조금이 중단되면서 비극을 맞게 된다. 매주 내야하는 집세는 러시안룰렛의 권총처럼 쉴 새 없이 핼리를 압박한다. 핼리는 무니를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결국 핼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핼리의 선택을 옹호해주고 싶진 않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었다고 해도 그녀가 무니를 키우기에 부족한 엄마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가난한 자의 처절함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이에게 복지는 혜택이 아니다. 생존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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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송파에서 살던 세 모녀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건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인 70만 원과 미안하다는 유서였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다.

 

기초생활수급자 혹은 차상위 계층으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소득의 기준은 굉장히 엄격하다. 조금이라도 그 선을 넘으면 바로 자격이 박탈된다. 나도 여러 이유로 박탈 위기에 처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시청 직원에게 묻고 물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 자격을 유지했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복지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있다. 복지의 사각지대는 생각보다 넓다. 그리고 그 안은 생각보다 비참하다. 여전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세 모녀에 관한 기사를 접한 나는 그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들이 받아야 했을 복지를 내가 뺏어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사를 보고 꽤 오랜 시간 마음이 무거웠었다. 이제는 안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을 외면한 정부와 세상이었다.

 

드라마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가난한 여주인공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찢어질 듯이 가난한 그녀들은 항상 명품 옷을 입고 최신형 휴대폰을 하고 부유한 남자 주인공을 만나 쉽게 인생을 바꾼다. 가난이 안겨준 가장 큰 역경은 상대 어머니의 멸시다.

 

나도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할 줄은 안다. 드라마에는 시청률이나 협찬 등 가난을 그대로 묘사할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요소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빈곤’이라는 소재가 그렇게 장식처럼 소비되는 모습을 보는 건 역시 불쾌한 일이다.

 

나의 빈곤은 타인의 행복을 꾸며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복지는 그 전쟁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이다. 나는 다시 말한다. 가난한 이에게 복지는 혜택이 아니다. 생존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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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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