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여행]

#5 여행에 지치다
글 입력 2019.07.16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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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5 여행에 지치다


Opinion 민현




[14] 파리, 너의 낭만을 책임질게



Paris. 파리하면 어떤 게 먼저 떠오르지?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얼마 전 큰 화재가 있었던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모두가 예술가라는 파리지앵들의 도시. 이탈리아를 떠나며 또 한 도시로 이동하는구나, 조금은 피곤함에 지쳐 있었다. 이동을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뜬 나는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렇게 잠에 들었다.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파리 오를레이 공항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매력적인 프랑스어가 들려왔고, 한 달 이상이나 여행 중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새로운 곳에 여행 온 기분을 느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 파리 사람들과 첫 만남을 가져본다. 몇몇 사람은 웃어주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큰 가방을 멘 나를 경계하기도 한다. 친절한 시선도, 무례한 시선도 익숙해진 나는 여행자의 본분을 찾아 목적지로 발을 옮긴다.


베니스에서 밀라노, 그리고 밀라노에서 파리까지 10시간이 넘는 이동에 지친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렸다. 2층 침대의 철제 격자, 그 격자에 누군가 껴놓은 루브르 박물관 입장권을 가만히 쳐다보며 파리와 파리에서 먹게 될 첫 저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식사 안 하세요?”


한식이 그리울 때마다 들렸던 한인민박이지만, 저녁까지 제공해주는 곳만큼 사랑스러운 곳은 없다. 일면식은커녕 이름조차 모르고 한 식탁에 모인 4명의 여행자는 비빔밥 한 그릇에 친구가 된다. 식탁에 놓인 와인과 맥주는 오늘부터 시작된 우정의 증표다. 오늘도 더운 날씨에 고된 이동이었던 걸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는 그들과 에펠탑의 밤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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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었던 에펠탑이 눈앞에 있었다. 그냥 철제 구조물이겠거니 했던 에펠탑은 생각보다는 크고, 생각보다 아름답고, 그 주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연남동 잔디밭을 상상하게 만드는 에펠탑 앞의 거리에는 관광객, 현지인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맥주며 와인이며 들이키며 밤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그 다양한 사람들 속 우리도 한 자리를 만들어 앉는다. 큰 에펠 앞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에펠을 파는 사람들, 쉽게 구할 수 없는 새벽의 알코올을 파는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의 불빛을 바라본다. 새벽 2시에 하얗게 변하는 에펠을 바라보며 다들 오늘 만난 사람들이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친구가 된다.



* 한국을 들고 온 친구


파리의 낭만을 기대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오랜 친구가 내 여행에 합류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지친 내 여행에 합류한 친구를 보자마자 나는 너무 반가웠다. 사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방랑자의 여행기라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둘이 다니면 방랑은 쉽지 않다). 아무튼 매운 라면과 함께 한국을 들고 파리로 온 내 친구와 앞으로 4주 간의 여행을 가야 한다. 혼자보단 둘, 둘보다는 셋이라고 말하지만 여행에서는 과연 어떨까. 그래도 어딘가 붕 떠있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새로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편안함, 내 친구가 들고 온 한국은 바로 그 편안함이었다.



* 인상파의 도시


유럽의 다양한 도시에서 가장 재밌는 점은 각각의 도시들이 내세우는 예술 사조와 예술가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파리의 예술적 분위기 역시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도시였다면, 파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홈구장이었다. 물론 루브르, 오르세를 필두로 파리의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수많은 작품이 있지만, 내가 느낀 파리는 인상파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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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마네, 고흐 등 걸출한 화가들이 모두 발을 디뎠던 파리와 그 근교의 풍경은 왜 인상주의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단 파리는 밤이 짧다. 그래서 빛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길고, 조금 더 감각적으로는 이곳의 햇빛과 노을은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센강과 에펠에 비치는 햇빛을 보고 있으면 내 눈의 건강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선글라스를 벗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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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혹시나 파리 여행을 계획하고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파리 가까이에 있는 모네의 마을과 고흐의 마을을 둘러보고, 미술관에서 그곳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지베르니, 오베르 쉬르 와즈, 이 두 마을에서 인상파의 두 거장이 그린 풍경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상상을 동원한 종교화가 대부분인 이전의 그림과는 다르게 인상파 그림은 아직도 우리가 그들이 그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 파리지앵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있다가 파리에 도착해서 길거리를 걷다보면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뭘까.. 고민하다가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문득 다른 나라의 테라스와 다른 점이 떠올랐다. 파리의 테라스는 거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놓여있는 반면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테라스는 울타리나 장막이 쳐 있거나 해서 길가를 바라보기 쉽지 않다. 나는 그래서 지나가는 파리 사람들의 면면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패션부터, 형광색, 초록색 등의 머리색, 온몸을 덮은 문신도 인상 깊었고, 동성 커플도 간간히 보였다.


오늘도 옆에 앉은 파리지앵은 뭔가를 열심히 읽으며,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고심하는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쓱쓱 적어가는 프랑스어가 굉장히 멋져보였다. 일주일이나 파리에 있으면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바라본 건 이들과 같은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밌고 새로웠다. 예술가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사랑한 도시 파리는 그래서 낭만이 가득하다. 당신이 파리의 낭만을 꿈꾼다면 어떤 낭만인지는 파리에서 직접 찾아야 한다. 사랑 혹은 예술, 새로운 사람과의 인연, 미래에 대한 고민, 열정, 그 무엇도 아니라면 파리에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낭만이 될 수 있다.




[15] 스위스



대자연의 나라, 신들의 산, 눈의 고향 등 어느 수식어도 어색하지 않은 스위스. 유럽의 중간에 있기도 하고 그 매력때문에 유럽 여행이라면 빼놓지 않는 나라에 꼽힌다. 나는 사실 여행에서 만나는 자연을 반기지는 않는다. 휴양지 느낌은 심심하기도 하고, 금방 질려버리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내 눈엔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처음 보자마자, 어딘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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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백설 공주 같은 옛날 동화에 나올 것 같은 마을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게다가 스위스 사람들은 여유가 넘치면서 조용하다. 사실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이들이 쓰는 언어는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등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누가 현지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스위스에선, 차도에 발을 뻗기만 하면 모든 운전자들이 바로 멈출 만큼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기차에서 스위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는지, 스위스가 마음에 드는지, 여행자에게 물어보는 그런 흔한 말들이었지만 그런 환한 웃음과 질문을 받으면 그 이동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나는 스위스에선 어떤 말을 주로 쓰는지 물었고, 자기는 독일어를 쓰지만 간단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했다. 대중교통에서 항상 긴장하고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는 피곤함이 사라지자 스위스에 도착했음을 느낀다.



* Iseltw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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튠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를 사이에 뒀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 스위스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많이 두는 인터라켄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나는 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이젤트발트에 하루 묵기로 했다. 브리엔츠 호수를 앞에 둔 이젤트발트,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더 큰 이 작은 동네는 스위스를 그대로 담았다. 야간버스와 기차를 타고 온 피로를 이 편안함에 녹여 내본다.



* First


스위스 도시들은 하나같이 이름에서 연상되는 재밌는 이미지 같은 것들이 있다. 하늘 아래 첫 마을이라는 뜻이라는 피르스트. 산장에서 수염을 잔뜩 기른 아저씨가 나와서 고기 뭉치를 꺼낼 것 같은 그린델발트. 높은 산에서 보면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 같은 그 마을들을 바라보는 것도 스위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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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피르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여러 액티비티였다. 스카이 다이빙, 패러글라이딩같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놀이가 조금 부담스러웠던 나는 산악 버기와 트로티 바이크로 스위스가 만들어놓은 놀이동산을 즐겼다. 자칫 잘못하면 풍경을 감상하다가 앞에 있는 운전자, 아니면 하이킹 하는 사람들, 잘못하면 방목하는 소에 들이박을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나도 길을 보면서 탔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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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트호른에 올라 말 그대로 광활한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내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진다. 인간이 처음 경외감을 느꼈을 때는 이런 자연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작은 점 같은 사람들이 몇 시간이고 걸어서 이곳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인간이 경외감을 느낀 후에 드는 감정은 바로 정복감인가 보다. 누군가는 결국 그 경외감을 이기고 그곳에 오르고 만다. 나는 누구나 이 산을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올라왔지만, 두 다리에 의지해 쉴트호른에 오른 이들에게마저 경외감이 느껴진다.




[16] 여행에 지치다



 

‘여행에 지치다.’


‘여행에 미치다.’라는 유명한 SNS페이지를 보고 생각난 '여행에 지치다'. 이러한 여행 관련 SNS에는 여행 욕구를 자극하는 예쁜 풍경들, 먹거리들, 사람들이 게시되곤 한다. 과제를 하다가, 시험 공부를 하다가, 알바를 하다가 그런 사진들을 보면 절로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진들, 후기들에 나도 마음이 끌렸었다. 특히 내가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유럽이라는 여행지 역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50일 간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내가 유럽에서 경험한 바로는 생각보다 고통의 시간도 길었다. 처음에야 열정과 체력이 가득찬 상태로 이곳 저곳 다녔지만 점점 기나긴 여행에 지쳐갔다. 더운 날씨부터 시작해서 빨래, 이제 질리기 시작하는 음식들,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내 방 침대에 비하면 불편한 잠자리까지.. 길을 걷다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면 습관처럼 ‘집에 가고 싶다.’를 중얼거리곤 한다.


이렇게 여행이란 타지에서 낭만과 현실이 계속해서 싸우는 과정이었다. 여행을 뜻하는 ‘travel’의 어원이 고통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travail’에서 온 것처럼 여행은 고통을 동반한다. 나뿐만 아니라 여행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많다.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도 있고 나처럼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 멀리 여행까지 와서 고통을 받으려 할까? 일상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그 대답은 '여행'이 갖는 의미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난 그 고통마저도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여행에 오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값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경험을 하지만, 여행에서 하는 경험 중에 일상적인 경험은 없다. 사람들부터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까지 모든 게 다 새롭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빨리 지치고 고통받는다. 지금의 나는 아마 거의 한계에서 왔다갔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나는 여행에 미친걸까, 아니면 아직까지 그렇게 지치지는 않은걸까. 고민을 서둘러 정리하고 나는 어쨌든 답을 찾아야 했다. 8월 1일까지 남은 내 시간을 '여행'을 위해 미친듯 지친듯 다니지 말고 한 곳이라도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제대로 만끽하고 싶어졌다. 여행에 지치지 않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은 바로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스위스 다음의 일정은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나는 어디로 갈지 정하기만 하면 됐다. 여기저기 발길이 닿는 곳으로 다니다가 마지막 1주일 정도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에 가서 머물기로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도시는 스페인의 세비야와 그라나다였다. 아마 여행 초반의 설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고, 그 도시에서의 경험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다시 가고싶어졌다. 어떤 '여행'도 하지 않고, 거기 사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일어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끔은 자전거도 타기 위해서.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제 정말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이 될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6의 부제목은 '여행을 정리하는 여행'이 될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여행에 미쳐 있는 상태로, 혹은 지쳐 있는 상태로 방랑하고 있을 것이다.





[손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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