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온몸으로 겪어낸 아픔의 역사 - 숨그네 [도서]

글 입력 2019.04.15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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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우연한 계기로 <숨그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숨그네>는 저자 헤르타 뮐러가 2009년 발표한 소설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정치성을 띠는 문학상 수상과는 관계없이, <숨그네>가 빌려온 언어의 울림은 그 자체로 각별했다. 텍스트가 독자에게 읽혔을 때 그의 정서에 새길 수많은 문장들이 있고, 그의 공터에 그릴 수많은 심상들이 있다.


뮐러의 언어는 선택에 있어 조심스러우면서도, 묘사에 있어 거침이 없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거미줄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베와 같이 수많은 수선들, 씨실과 날실들로 빈틈없이 직조된 듯 보인다. 단순한 명제들을 원리로 삼으면서도, 그것이 지니는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글을 읽는 순간, 마치 아코디언과 같은 접이식 이미지가 당신의 머릿속에 무한히 펼쳐진다.


<숨그네>는 질척한 글들에 모종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신선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책보다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어떤 기회로든지 이 글을 읽게 된 모든 분들이 스스로 <숨그네>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고, 머릿속에 자신만의 <숨그네>를 지어볼 수 있도록 이 책은 온전히 그 분들께 내맡기고 싶다. <숨그네>는 거미줄의 작은 이슬 하나하나까지 온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줄거리나 인물 구도, 저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잠시 차치하고, 독자분들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숨그네>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원활한 설명을 위해 <숨그네>가 실존 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며, 수용소 문학에 해당된다는 점 정도만 짚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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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숨그네>의 언어는 다분히 시적이다. 그러나 '시적이다'라는 말에서 추출되는 선입견과는 달리, <숨그네>의 시적 언어는 생각보다 은유적이지 않다. 오히려 <숨그네>의 시적인 표현들은 주인공 레오가 수용소 내외에서 받아들인 여러 감정들을 원형적 상태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언어의 시적 특성은 텍스트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정서를 안전히 보존하는 단단한 표피이기도 하다. '흰 손수건'과 같은 상징들, 그리고 '숨그네'와 같이 뮐러가 서로 다른 단어들을 조합해 만든 여러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시적 언어는 저자 뮐러의 사명이기도 했다. 뮐러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 헤르타 뮐러



저자의 이러한 의지는, <숨그네>의 주인공 레오로 하여금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도록 했다. 외려 경련도 절규도 없는 문체의 담담함 때문에 글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려서부터 말들을 잘라 모았던 뮐러의 말 상자에는, 경첩 위로 손을 내뻗는 아우성들이 가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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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의 저자 헤르타 뮐러


둘째로, <숨그네>의 언어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보인다. 뮐러와 주인공 레오는 자기 영역 설정의 기점으로, 또 자기방어기제의 작동점으로 '물건'을 선택한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물건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고통의 기억들에 무던히 쌓여있다. 통제 불가능한, 그리고 탈출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우리는, 아주 단호하게 존재를 보호할 영역을 구획한다. 그리고 그 영역의 밑점은 우리의 인식 범위 안에 있는 다양한 물건들이다.


삽, 수프, 침대 등의 물건들은 고통스런 외부 환경과 나 사이의 경계를 (정신적으로나마) 그어준다. 이 물건들로 보이지 않는, 성글지만 질긴 거미줄을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쓰라림이 깊을수록 나의 손이 닿은 물건들을 더욱 잘 기억하게 된다는, 우리가 고통을 겪어내는 방식을 <숨그네>는 '물건'의 언어로써 축조했다.


레오가 수용소에 끌려가 노역을 하며 보낸 몇 해는,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 개인의 역사이며, 언어로 쓰인 소수자의 기억이다. 내 안에 침투한 이방인의 언어가 나의 괴로움과 맺은 관계는 종신의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숨그네>의 언어가 입은 거미줄에 책갈피가 걸려 멈칫하게 되더라도, 레오가 말하는 수용소의 모습을 켜켜이 그려가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그곳에서 맞이할 겨울잠을 상상하며 레오가 그의 토양에 꽂은 색인들을 확인해보길 추천드린다.


아픔의 기억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며 그것에 입맞춤을 보낼 수 있길, 또 뮐러와 함께 책의 제목 '숨그네'의 의미를 숨쉴 수 있길 바란다.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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