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전사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연극 <여전사의 섬> 리뷰

글 입력 2019.03.2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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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의 섬’을 쓰며 굉장히 두려운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고 내가 쓴 한 글자, 한 글자가 무서웠다. 노트북 앞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쓰게 됐다. 여전사를 만나기 위해 내가 살아온 세상을 더듬거렸다. 아직 여전사를 만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평생 여전사의 뒤를 좇기로.



임현주 작가의 작가노트에서 극의 후반부를 떠올렸다. 지니와 하나가 각각 고용주에게, 남편에게 폭력의 위기에 처하면서 남성 캐릭터들의 대사가 어지럽게 얽히는 장면. 그 가운데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자매의 모습에서 관객들 역시 동일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짜여진 각본을 따라가며, 작가의 창작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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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쌍둥이 자매 지니와 하나, 여전사인 엄마, 그리고 아빠를 포함한 남성 캐릭터들 모두 어느 정도는 실제로 존재할 법하다. 만년 취업준비생으로 압박감에 시달리는 지니의 모습과 스튜어디스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게 된 하나의 모습은 일견 대비되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엄마에 대한 결핍과 의문이 그들의 내면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지니는 자신이 계속해서 취업에 실패하는 것이 엄마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품고, 하나는 ‘엄마 없는 아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벽함에 대한 강박 속에서 지낸다. 동일한 가정 환경을 공유한 두 자매가 어떻게 다르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설정이 인상적이다.

지니는 하나보다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사람이다. 면접을 볼 때도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아빠에게 엄마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조를 때에도 마찬가지다. 반면 하나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언제나 꾹꾹 눌러참는 편이다. 이들은 이렇게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인생의 괴로움을 계속해서 맛봐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 지니는 계속된 압박면접을 이기지 못해 단기 아르바이트로 도피하고, 하나는 경영진의 불합리한 결단과 가정 폭력에 희생된다.

그러나 두 자매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가장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둘은 동시에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힘껏 상대를 밀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둘에게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몰아세우지만 이는 정당한 행위일뿐더러 가장 ‘여전사’에 가까운 대응이다. 여기에서 지니와 하나의 엄마, 아마조네스에 대한 이야기가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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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의 섬> 프리뷰를 작성하면서 가졌던 의문이 있었다. 여전사가 하나의 상징으로 이용된 것인지 아닌지가 시놉시스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엄마는 정말로 전설 속 아마조네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일단 자신을 아마조네스로 정체화했고, 끊임없이 여전사의 섬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영락없는 전설 속 아마조네스 그 자체이다.

그는 친구들을 찾아 자신도 섬으로 떠나기 위해 한 남자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조금씩 한국 사회에 적응해나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혼란스러워하는 한편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하며 마침내 여전사로서의 의무감을 잠시 내려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전사의 섬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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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이 절묘하게 혼재된 작품인 만큼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현실의 고통과는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 것 같던 엄마의 이야기는 조금씩 지니와 하나의 삶에 스며든다. 극 전체의 흐름과는 달리 이러한 스며듦은 느린 호흡으로 진행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역할놀이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대면한 두 자매가 엄마를 찾아 여전사의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두 딸을 묘한 미소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를 스쳐지나간다. 그 시점에서 둘은 이야기한다. 이미 우리는 여전사의 섬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엄마가, 그리고 작가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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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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