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국악과 셰익스피어

글 입력 2018.09.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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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거울로 비춰본 듯


얼굴은 팥죽색이며 다리에 털이 숭숭 나있었다는 외향적 유사성과 이방인 신분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고 그를 질투하는 자가 있었다는 내용적 유사성. 비슷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시대도 장소도 이름도 너무 다르기에 그 연관성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처용가와 오셀로를 연관시킨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기발한 것 같다. 이야기꾼 단이는 여기에 두 사람은 마치 거울로 비춰본 듯 비슷하다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거울로 비춰본 듯 비슷하다” 거울에 무언가를 비추면 모든 게 다 똑같지만 좌우가 반전이 된다. 그녀는 처용가와 오셀로의 결말이 정반대라는 말을 거울에 빗대어 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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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오셀로>는 이렇게 처용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며 극 초반부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난 이번 공연을 통해 판소리에 대한 편견을 상당히 부술 수 있었다. 판소리 공연에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곡들만 부를 것이고, 그래서 이해하고 공감하기 힘들 것이라는 편견과 무대나 음향적인 면에서의 표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편견 말이다. 소리꾼의 입에서 나온 오셀로, 데스데모나같은 이국적인 단어들은 어색함을 느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적응이 됐고 너무나 신선했다. 바닥에 검은 테이프를 붙인 건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명이 반사되자 뒤의 커다란 달과 어울리며 표현해 낸 달밤의 강가도 너무 멋있었다.



너무나 대중적이다


고수와 아쟁, 타악, 가야금, 피리 연주자들의 반주와 함께 박인혜 소리꾼의 창을 들으니 정말 신이 났다. 아는 사람만 아는, 움직이려는 몸 특히 어깨를 주체 못한다는 그 신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을 느꼈다. 애절한 목소리 때문인지 특유의 창법 때문인지 슬픈 내용이 아니더라도 판소리에는 한이 느껴진다. 한을 의미 그대로 번역할 수 있는 외국어 단어는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외국인에게 한을 설명할 때는 판소리를 들려주리라고 다짐했다.

박인혜님이 관객과 소통하는 것 또한 좋았다. 공연 날에 비가 꽤 많이 왔는데,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우중충한 날씨에 비를 뚫고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원래 극한 상황에서 이야기가 더 잘 들어온다는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공연장이 촛불 몇 개 켜고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는 아늑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또 앞줄 관객 앞에 술상을 놓고 상대역 (1인 N역이라 상대역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하셔야죠’라고 하기도 하고 대답을 잘하자 ‘착실하시네요’라고 하기도 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관객과의 소통이 너무 과하면 극의 몰입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이야기꾼이라는 설정인 이상 이상할 것이 하나 없었고 오히려 극에 재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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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나으리~


그 많은 오셀로의 등장인물들을 박인혜 소리꾼님이 1인 N역으로 소화해내는데 이 또한 인상 깊었다. ‘오셀로’를 한 명이서 한다고? 놀랐던 게 무색하게 역할이 바뀔 때마다 목소리와 자세가 변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특정 인물의 아니리마다 정해진 말투나 조가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아 각각의 분위기는 유지하되 조금씩 다르게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또 공연을 보기 전에 외국 이름이나 지명을 그대로 말할 것인가 아님 조금씩 바꿔 말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따로 수정을 하지 않고 ‘오셀로 나으리~’ 이런 식으로 영어이름에 사극 말투를 섞어 말하는 것도 재밌었다.



아쉬웠던 점


판소리는 생소하고 오셀로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공연이 너무 기대되었던 이유는 바로 “동양 여성의 눈으로 쓰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이후 오셀로를 읽고 사랑, 질투, 치정 속에 드러나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과 이보다 더 수동적일 수 없는 데스데모나를 보며 판소리 오셀로에 몇 가지 기대를 걸었다. ‘동양 여성의 눈으로 쓰는’ 에는 동양 여성이 재해석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팜플렛에는 아예 재해석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얼마나 각색을 했을지 감은 안 왔지만 원전을 함부로 재해석하는 건 쉽지 않으므로 판소리의 특성을 살려 중간 중간 해학적인 한마디를 덧붙이는 정도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공연은 사실 동양 여성의 입을 빌려 전하는 오셀로에 그치고 말았다. 물론 조선시대 여성이 서양 고전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좋았지만 기대를 한만큼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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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또한 흐드러진 밤


이번 공연을 주관한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은 팜플렛에 이런 말을 적었다:


“우리는 판소리가 열어 보이는 넉넉한 품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판소리는 이러해야 한다’ 보다는 ‘판소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합니다.”


나는 이번 공연을 보며 더 많은 판소리 공연, 국악 공연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판소리의 미래, ‘판소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까지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판소리로 듣는 오셀로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으니 더 다양한 국가, 시대, 장르와의 혼합도 당연히 가능할 것이다. 국악과 서양 악기나 전자음악이 어우러지는 퓨전 공연이 더 흥행했으면 좋겠고 국악으로만 이루어진 뮤지컬도 보고 싶다. 현대적인 내용과 의상의 뮤지컬을 국악으로 한다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흐드러지다’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한국어 표현 중 하나이다. 국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외국의 악기로는 흉내도 못내는 것처럼 ‘흐드러지다’도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 그래서 밤이 더욱 깊어 달빛 또한 흐드러졌을 때 이야기를 끝맺겠다는 대사는 그날 내리던 비와 함께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판소리 오셀로는 희비쌍곡선의 다음 공연, 국악의 새로운 발전이 너무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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