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 하나 우주를 건너 내게 온다는 것 [도서]

글 입력 2018.05.1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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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어렵다. 중, 고등학교를 지나 지금까지 내가 종종 시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내 책장에 시집은 단 두 권뿐이었다. 시 속 단어들이 가진 함축적 의미가 나는 부담스러웠다. 시의 단어들이 마음속에 들어와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시집을 자주 들췄지만 시는 여전히 내게 멀었다.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시를 구성한 단어들은 단순하고, 익숙하게 쓰이는 것들이었지만 내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

 중,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시에는 '답'이라고 하는 의미를 알려 줄 선생님이 있었다. 문학 선생님은 시의 문장마다 빨간 밑줄을 긋게 하고 그 밑에 해당 구절에 맞는 해석을 쓰도록 했다. 그 해석은 곧 시험에 나왔고, 5개의 보기 중에 하나를 골라야만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시의 주제는, 다음 시구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지 내가 직접 느끼기 전에 선생님은 의미를 말해주었다. 그건 내가 시를 읽고 품은 의미가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오지선다 형 문제에서 시의 주제와 의미를 고르지 않아도 되고, 시구 밑에 빨간 밑줄을 긋지 않아도 되었다.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시를 읽을 줄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는 도리어 더 멀리 도망쳤다. 빨간 밑줄도, 해석, 주제 파악을 알려줬던 문학 선생님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하얀 종이에 적힌 우주처럼 광활한 시들과 마주했다. 시는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처럼 어렵고 넓어 보이기만 했다. '어렵다'라는 말로 나는 자주 시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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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 내게 온다는 것은
우주적이다
새하얀 은하가 눈 시리고 붉디붉은 행성에게서 죽은 버섯 냄새를 맡는다 미래와 어제가 딸려 오고 득실거리는 실패까지 파고드는 죽음까지 어루만져진다

나를 열어젖히면 한 곳이 은밀했다
바람 맛이 나는 이곳 긴 터널인 줄 알고 걸어 다녔다

어쩌다 시를 멈추면 시를 멈추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서있었다
우 모여든 터널 안 사람들

시 하나 우주를 건너 내게 온다는 것
숨 가쁘다

오늘, 최문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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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결한 시의 문장 앞에서 벌벌 떨던 내게 한 책이 손을 내밀었다. '시의 문장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시는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고, 내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시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고등학교 문학 시간 때처럼 시구 하나하나에 밑줄을 그으며 해석할 필요도, 시에 담긴 모든 의미를 세세하고 완벽하게 분석할 필요도 없었다는 걸 알았다.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음악을 듣고 그저 좋은 느낌,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시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마음 느껴지는 대로 감상하면 되는 것이었다. 시를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으로 읽는 순간 시는 광활하고 어두운 우주를 건너 내게 왔다.


시를 읽다 보면 어떤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한 줄짜리 문장에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도 있고, 시의 제목과 작가는 다 잊었지만 구절만은 남아서 평생 잊히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처럼 시의 문장이 그대로 제목이 되어 나오면 그 시집은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읽는 순간 그것은 그대로 내 삶의 표어가 된다. 비록 몸으로는 살지 못하고 그저 마음뿐이라 해도, 그 문장이 있어 삶은 잠시 빛난다. 반딧물 같은 그 빛이,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은 적 없는 어둑한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든다. 그 빛을 잊었을 때조차 잔영은 남아 길 잃은 걸음을 비춘다.


 김이경 작가가 머리말에 남긴 자신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는 자신이 시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부분만을 읽고도 나는 시가 내게 천천히 다가옴을 충분히 느꼈다. 그 뒤 작가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뒤흔들고,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삶의 지표가 된 시 속 문장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 나는 작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마냥 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어졌다. 시가 이렇게 삶 가까이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업었지만 시의 문장은 매끄럽고 날카로운 바늘과 같은 모습으로 삶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주를 건너온 시의 문장을 읽는다.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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