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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흥망성쇠에 시비를 가려 무엇하리 - 천명관 '고래' [도서/문학]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고전이 될 이야기

by 문아휘 에디터
2026.08.26 17:58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 


 

재미있고 감동이 있고 교훈이 있는 것. 혹은 그 어떤 것도 없지만 단 한 문장으로 오랫동안 그 소설을 끌어안고 있게 만드는 것. 각자의 감상은 제각각이지만 개인의 감상을 뛰어넘어 모두를 아우르는 소설을 우리는 대게 ‘고전’이라고 부른다. 고전소설은 그저 오랜 시간을 견뎌낸 책이기에 부여되는 칭호가 아니다. ‘세월’만이 선사하는 것이 아닌 그 세월 속 존재해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오래오래 전해져오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건 대화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에 공감하고 그 작품 속 인물의 행동에 나름대로 경중을 때리고 시비를 가린다. 그렇게 따라간 이야기의 끝에 존재하는 것이 값비싼 삶의 교훈일 수도, 값싼 눈물일 수도, 그저 허무일 수도, 아니면 피식 웃어넘기게 되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그 끝에 있는 게 무엇이든 모두 비슷한 것을 느꼈다면 집단적 정서가 된다. 그 집단적 정서는 하나의 작품이 세기가 바뀌더라고 꾸준히 사람들의 손에 들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고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순 역사적 가치 측면만을 바라보면 고전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최근 극장가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영화 ‘오디세이’처럼 신화일지라도, 혹은 설화나 우화일지라도 판타지 속 몇백 년 전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집단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새로우면서도 재미있고 익숙한 듯 공감되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때도 지금도 세상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있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세월을 거울삼아 여전히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이 관점에서 ‘고래’라는 책을 다시 보면 이 책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고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허구의 이야기를 마치 어딘가에서 직접 듣고 필사한 것 같은 이 작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소설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그게 이 작품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이고 좋은 소설인 이유이다. 고래라는 소설 그 끝에 있는 것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그 안에서 찾아내는 재미는 앞으로 몇 세기가 바뀌더라도 천명관의 고래가 사람들의 손에 붙들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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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부두: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으로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 작품엔 총 세 명의 주요 여성 인물이 나온다. 노파, 금복 그리고 금복의 딸인 춘희. 첫 장에서 춘희가 교도소를 나와 벽돌 공장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들의 과거 얽히고설킨 악연들에 대한 서사가 풀린다. 노파는 국밥을 팔아 번 거금을 어딘가에 숨겨뒀고 그 돈을 노리는 자신의 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초장에 죽은 노파가 주요 등장인물인 이유는 그렇게 죽은 노파의 영혼이 작품 내내 원혼이 되어 떠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금복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영민한 여성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가 풍기는 냄새에 몸을 붉히는 그런 미인으로 나온다. 그런 그녀가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풍파를 겪는 과정을 그린다. 소설에서 금복은 ‘욕망하는 인간’이다. 그저 욕심이 많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알 수 없는 갈증이 그녀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금복을 그토록 갈망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녀가 처음 배에 올라타 여정을 시작할 때 그녀는 압도당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우연히 지면 위로 뛰어올라 온 세상을 덮을 듯하더니 다시 고요한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린 ‘대왕 고래’였다. 그 고래는 금복에겐 평생 발버둥 쳐도 절대 가지지 못할 무언가를 심어주고 영영 사라진다. 그 경험이 이 소설 내내 금복을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고전소설은 현대와는 다르게 인물들의 내면보다는 흥미로운 스토리의 나열이 특징이다. 그렇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보다 등장인물을 유형화하여 작품을 끌고 간다. 1부에 나오는 남성들은 대부분이 아주 평면적으로 그려졌다. 모두 성욕에 눈이 먼 흡사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둔하고 어리석으며 악했다. 이런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저 어떠한 장치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용도의 인물들이다. 큰 고민을 하게 만들지도 않고 깊게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지도 않아도 되는 남성 인물들이 이 소설 1부엔 다수 등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어부, 벌치기, 얼굴에 칼자국이 있어 칼자국. 대게 이런 식이다. 이런 소소한 요소들이 구전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 정말 눈앞에서 만담꾼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천명관 작가의 문체는 초반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2부 평대: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지혜로웠던 금복은 남편을 잘못 만나 우여곡절은 겪고 남편을 떠나보낸 뒤 기이하게도 얼마 안 가 아이를 임신한다. 바로 춘희였다. 춘희는 죽은 남편과 굉장히 닮았다. 소설에서 남편과 금복은 몸을 나누지 않은지도 오랜 시간을 흘렀음에도 춘희가 태어나자마자 남편의 아이인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모성애가 있다거나 춘희를 사랑으로 보살피지 않았다. 두 모녀는 만날 수 없는 수평선처럼, 아니 어쩌면 방향을 다르게 잡은 선이 시간에 따라 점차 서로에게서 벌어지듯이 멀어져 갔다. 금복은 그 뒤에도 숱한 남자들을 만나고 손대는 사업도 척척 성공하며 1부에서 보여준 그녀의 비범함을 더 강조했다. 그녀의 벽돌 공장은 그녀의 영광이었다. 그저 세상을 읽는 감 하나를 가지고 그녀는 무모하지만 배짱 있게 모두를 통솔하며 벽돌 공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녀의 모든 행보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쾌청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금복은 이곳에 나오는 세 여성 중 가장 활기가 넘치는 여성으로 묘사한다. 위기를 맞더라도 지혜롭게 해결하고 실수하더라도 그 결단력에 반해 그녀의 다음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여성이었다. 아이를 챙기지 않고 여러 남성과 정을 나누는 그녀지만 그녀의 행보를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금복에게 넌덜머리가 난다'라며 혀를 차다가도 그녀가 무언가 시작하려고 하면 자세를 고쳐앉아 그녀가 보여줄 환상적인 이야기에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몰락을 그린 파트가 바로 2부였다. 총명하고 똑 부러질 줄 알았던 금복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수련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금복은 한평생 바람기로 옆을 지키던 남자들을 메마르게 했지만 여성을 좋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수련을 보며 과거의 자신과 닮아서였는지 완전히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때부터 그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들 어릴 적 읽은 고전소설에 나오는 모티브들 중 ‘변신 모티브’를 기억할 것이다. 여성이 남성이, 남성이 여성이 되는 이 변신 모티브는 소설의 신비롭고 환상적임을 강조하고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설정이 된다. 변신 모티브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이날 이후 그녀가 점점 남성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복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이유는 비단 남자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복은 이전 남성이 자신을 대했던 것처럼. 마치 과거의 자신을 어루만질 듯 수련을 끌어안았고 저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던 남성들처럼 금복 또한 수련에게 미쳐서 무식하고 어리석어졌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던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누군가를 피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금복이란 사람의 말년은 결국 자신을 오래 따라다니며 원한을 품고 있던 노파의 영혼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노파가 숨겨둔 돈을 금복이 우연히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서 그 욕심을 멈췄다면 뭔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사실 금복이 크게 욕심부린 것은 없었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금복이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금복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은 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위기의 순간에 악착같이 살고자 발버둥 치던 그 생명력을 기억하기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소설 초반 바다를 건너 부두까지 닿을 때 대왕 고래를 보고 압도당했던 금복을 기억하기 때문에, 고래 모양의 극장을 만들겠다며 광기에 휩싸인 그녀를 보며 욕망이 가득한 인간보다 처음 꿈을 꾸던 어린 소녀를 느끼고 거기서 독자들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인생사를 읽으면서도 독자들이 ‘공감’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짧은 시간에 담아내면서 높은 몰입감을 선사하였고 금복이 죽고 나서 독자들은 남은 춘희의 이야기에도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301p
 

 

 

3부 공장: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 내는 거나 다름이 없다.


 

춘희는 죽은 금복의 남편과 닮았고 그 때문에 금복에게서 방치되었다. 그녀는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여성이었고 도통 사람이라고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도 낮았다. 그런 그녀의 고래는, 여기서 고래란 금복이 부두로 가 처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그때 그리고 그 이후 한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이라던가 환상이라던가 영광 같은 것처럼 춘희의 고래는 코끼리 점보였다. 서커스단에서 나온 점보는 유일한 춘희의 친구였고 춘희는 점보가 죽었을 때 자신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상심했다. 그 이후엔 벽돌 공장에서 금복의 몇 번째 남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문 씨와 오묘한 부녀관계의 교감을 나눈다. 금복이란 여성이 태양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언제나 파도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 바다 같은 여성이었다면 춘희는 마치 고요한 적막 속 바람과 풀 스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산 같은 존재였다. 우직하고 말이 없었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들은 도통 알 수 없는 여성. 춘희와 문 씨는 함께 벽돌 공장에서 일하고 벽돌을 만들고 나르며 서로를 부녀로 인식하게 된다. 서로에게 의지한 것일 수도 있고 단지 서로가 아니면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춘희는 문 씨와 벽돌 공장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금복이 죽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춘희는 결국 벽돌 공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폐허인 그곳에서 다시 가마를 올리고 벽돌을 찍어냈다. 춘희는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했으며 그저 벽돌을 찍어내며 평화로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소망했다. 벽돌을 구워내다 보면 모두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멍청해서 보는 사람마저 측은지심이 들게 만드는 생각으로 그녀는 다시 벽돌 공장에 불을 지폈다. 벽돌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금복에게 고래는 꿈을 꾸게 만들고 갈망하게 만드는 욕망의 상징이었다면, 춘희에게 벽돌은 추억을 붙잡고 상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춘희는 계속해서 잃는 삶을 살았다.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많은 삶을 살아가면서 앞을 보고 살아가기보단 춘희는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선택을 한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도 생기고 아이도 낳았지만 모두 떠나보내고 결국 또 춘희에게 남는 것은 벽돌을 굽는 일뿐이었다. 몇 년간 아무도 벽돌 공장을 찾지 않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벽돌을 구웠는데 그 이유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도 그렇듯 현실이 너무 괴로울 때 현실을 잊고 숨어버리고 싶은 도피처가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춘희가 돌아가고자 했던 시절이 언제인지 무엇을 그토록 원했을지 이 소설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계속해서 벽돌을 굽기만 하는 춘희의 쓸쓸한 모습은 마음 한편 공허한 기분이 들게 한다.

 

고래라는 작품은 마치 고전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한국전쟁이라든지 근대화 같은 한국의 시대적인 틀을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내면서 스토리 라인까지 완성도도 높았다. 이 작품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이면서 기이한 구화는 고전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는 현실성 없는 허구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가장 선명하게 인간의 깊숙한 곳을 찔러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인가? 다시 질문을 해보자면 이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소설은 좋은 소설인가?’

 

환상적이고 기이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소설은 불쾌하고 저급하고 잔인하고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표현도 거슬린다. 누군가에게 소설을 추천해야 한다면 잠시 멈칫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다. 다만 좋은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아니다. 천명관 작가가 독자들을 데려간 그의 판타지적인 세계는 잔인했으며 읽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크게 교훈을 주고자 하는 작품도 아닌 것 같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특정 인물들의 행보를 다큐멘터리 카메라 감독처럼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차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여서 독자들은 멈출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집단적 정서'일 것이다. 모두가 같은 것을 좋아하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독자들이 하나의 작품에서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그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

 

여성인 나는 중간중간 보이는 여성 혐오적 표현들에 구역질이 나면서도 절대 그만두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인 점에서 얼마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소설인지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단점이 명확한 소설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면 누구든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과 동시에 ‘좋은 소설’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래'가 앞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손에 들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작품이 고전이라 불리는 날까지.

 

왜냐하면 '고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좋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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