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명징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가위눌린 꿈처럼 낯선 장면이 이어지고, 시적인 표현과 수많은 암시 속에 니체의 생각이 숨어 있다.
어렵기로 악명 높은 책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 언젠가는 읽어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호기롭게 리뷰어를 신청했다. 그리고 책을 받아 몇 줄 읽지 않아 곧바로 난감해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암시와 낯선 단어, 좀처럼 뜻을 붙잡을 수 없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명 글자를 읽고 있는데도 내용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앞뒤가 분명하지 않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읽은 변학수 번역·주해판은 본문 뒤에 친절한 해설이 붙어 있어 나 같은 니체 초심자에게 꽤 좋은 판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만 읽었을 때는 ‘지금 내가 뭘 읽은 거지?’ 싶었던 부분도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맥락이 보였다.
영원회귀에 대한 나의 생각
모든 문장을 이해하려 애쓰다가는 한 페이지도 제대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조금씩 흘려보내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상하게도 몇 번이고 마음에 남게 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원회귀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는 그 중요성에 비해 좀처럼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원회귀’라는 표현 자체도 드물게 등장하고, 대부분 꿈과 수수께끼, 암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3부 [환상에서 본 수수께끼에 대해]는 영원회귀의 난해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숲속의 오솔길을 오르며 어깨 위에 올라탄 ‘무거움의 정령’인 난쟁이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이 순간’이라는 이름의 성문 앞에 도착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그곳에서 두 개의 길을 바라본다. 한 길은 뒤로 끝없이 이어지고, 다른 길 역시 앞으로 영원히 이어진다. 두 개의 영원이 ‘이 순간’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영원회귀는 직접 설명되기보다 ‘심연의 생각’이라고 불리거나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차라투스트라가 직접 영원회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회복하는 자]에서는 그의 짐승들이 차라투스트라를 ‘영원회귀의 선생’이라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사상이라면 친절하게 설명해줄만도 한데, 니체는 오히려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또 있었다. 영원회귀와 초인은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초인간이 지금의 인간을 넘어 자신을 극복하고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모든 것이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영원회귀와는 어딘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다시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이 같은 철학자의 사상이 맞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책의 해설에서는 니체가 영원회귀를 인간이라는 대리석을 두드리는 ‘망치’에 빗댄 기록을 소개한다. 초인간이 인간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목표라면, 영원회귀는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게 만드는 사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읽고 나니 두 사상이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다.
아마 이 책을 한 번 읽은 것만으로 두 사상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의 해설에서도 [차라투스트라]의 영원회귀를 분명한 하나의 논리로 정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는 문장 때문에 답답했지만, 읽고 난 뒤에 계속 질문이 생긴다는 점이 오히려 이 책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두 개의 영원이 이 순간에서 만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온다면 인간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영원회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를 다소 주관적으로 이해해보았다. 나는 여기서 니체의 ‘삶을 긍정한다’는 태도를 발견했다.
영원회귀는 [즐거운 학문]에서 조금 더 직접적인 질문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느 날 악령이 찾아와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행복했던 순간만이 아니다. 고통도, 쾌락도, 생각과 탄식도,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아주 작은 순간까지도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온다.
니체는 이 질문을 ‘최대의 중량’이라고 표현한다.
처음에는 영원회귀를 단순히 ‘삶이 정말 반복되는가’에 대한 주장으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정이 나에게 남기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지금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
기쁘고 만족스러운 순간뿐 아니라 후회하고 지우고 싶은 순간까지 똑같이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그래도 이 삶을 원할 수 있을까.
니체가 좋아지게 된 이유도 이 부분 때문이었다. 니체는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결론을 삶에 대한 부정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고통이 존재하니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럼에도 어떻게 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과도 이어진다.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긍정하는 쪽으로도 부정하는 쪽으로도 확실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분명히 좋은 날들도 있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도 있었기에.
이렇게 나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니체의 질문이 싫지 않았다.
자기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어쩌면 니체는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나서
분명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했고,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다. 그렇지만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한 번 읽고 답을 얻는 책이라기보다, 읽은 뒤에도 계속 새로운 질문을 가져오게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도덕의 계보]와 [안티크리스트]처럼 니체의 다른 책들도 조금 더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돌아오고 싶다. 그때는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친 문장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