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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다정한 언어 -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서수연,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by 윤희지 에디터
2026.07.20 14:22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다 함께 웃고 우는 일은 대단한 권리라기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에 가깝다. 그러나 시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에게 이 당연한 일상은 매번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히는 까다로운 과정이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우리나라 첫 음성해설 작가이자 성우로서 드라마, 외화, 연극, 전시에 이르기까지 7,800여 편의 작품을 다뤄온 서수연 저자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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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본문에 앞서 많은 독자에게 낯설 수 있는 ‘음성해설’의 개념과 용어를 짚으며 시작한다. 음성해설은 시각장애인이 문화콘텐츠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영상과 비영상 매체 속 시각적 요소들을 음성으로 번역해 들려주는 서비스다.

 

언뜻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대중에게는 오랜 관행적 표현인 ‘화면해설’이 훨씬 익숙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러 인터넷 지식백과나 뉴스기사에서도 이를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 나 역시 화면해설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TV화면의 우측 하단 귀퉁이에서 수어 통역을 하던 모습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 해설까지 온갖 장면을 뭉뚱그려 떠올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넷플릭스 드라마 「안나라수마나라」의 음성해설을 두고, 시청자들이 “자막을 참 아름답게 썼다”고 칭찬한 해프닝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화면해설’이라는 명칭은 목적도 대상도 다른 서비스들과의 혼동을 주기 쉽고, 나아가 이용자는 정작 필요한 서비스를 찾고 사용하는 데 불편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여, 관행적인 화면해설 대신 ‘음성해설’이라 불러야한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화면해설’이라는 표현은 은연중에 영화나 방송 같은 스크린 영역만을 떠올리게 만든다. 연극, 뮤지컬을 넘어 미술 전시에 이르기까지 무대 밖으로 넓어지는 음성해설의 지평을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특정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명칭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990년 미국 방송사에서 비롯된 비디오 설명(video description) 명칭이 유입되며 화면해설로 굳어졌으나, 2020년 미연방통신위원회(FCC)는 이를 국제 표준이자 보편적 명칭인 음성해설(audio description)으로 공식 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정확한 명칭을 쓰던 넷플릭스마저 최근 표기를 ‘화면해설’로 바꾸며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씁쓸한 현실을 짚어내며 ‘이름이 바뀌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비로소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대상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단어 하나를 바로잡는 사소한 노력이, 어쩌면 진정한 접근성을 위한 가장 분명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영상 음성해설을 경험하고 싶다면, OTT 플랫폼 영상 재생 화면에서 “음성 및 자막” 메뉴의 “화면해설”, TV “접근성” 메뉴의 “(음성으로) 화면해설”을 선택한다. 단, 여러분이 보고 있는 영상물에 음성해설 서비스가 제공되어 있을 확률은 10퍼센트 이하일 것이다.

 

- 15쪽

 

 

‘접근성’을 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정작 그 기능을 써볼 수 있는 콘텐츠는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사실은 씁쓸한 아쉬움을 남긴다. 책은 이처럼 부족한 현실을 짚어보는 데서 나아가, 그 좁은 선택지 안에서 대본을 쓰는 작가들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고민들과 경험을 담담하게 이어나간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이 보여주는 작업 전반은 결국 완전히 가닿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입장에 어떻게든 서보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이 일의 시작이자 가장 근본적인 뼈대일 것이다. 장르와 매체, 국내외 출처를 막론하고 무한하게 확장되는 복잡다단한 콘텐츠의 세계 속에서 음성해설 작업은 매 순간 수많은 기준선을 넘나들며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화면 하단에 흐르는 번역 자막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만약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면 시청자 게시판은 금세 항의 글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번역 자막을 필수라고 여기는 우리는 더빙 앞에서는 유독 인색해진다.

 

“어색하다”, “원작의 느낌이 살지 않는다”, “외국어 공부를 해야 한다” 하는 이유로 더빙은 어느새 우리 일상에서 저만치 밀려났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더빙을 멀리하는 사이, 누군가는 영상 콘텐츠라는 거대한 세계의 밖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 97쪽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더빙판의 필요성을 다룬 이야기였다. 저자는 자막 번역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더빙 영화는 턱없이 부족한 국내 콘텐츠 산업의 단면을 언급한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더빙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아득해 극장 상영작을 찾아보았더니, 그나마 더빙판이 제작되던 극장 애니메이션조차 최근에는 자막판 위주로 상영될 만큼 그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상실은 극장뿐 아니라 안방 스크린에서도 반복되었다. 주말 아침 해외 영화를 소개하는 TV 방송들에서 영화 속 장면 위로 얹어지던 성우들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졌고, 이제 해외 다큐멘터리의 짧은 인터뷰 장면에서조차 자막으로 대체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저자가 인용한 한 시각장애인의 인터뷰 내용은 무심했던 시야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화면을 볼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외화를 보란 말입니까! 시각장애인은 왜 국산 영화만 봐야 하나요?” 더빙과 음성해설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모두를 위한 콘텐츠를 지향하려면 소외되는 관객 없이 우리 콘텐츠 산업에 최소한의 다양성과 선택지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극장에 가면 습관적으로 관객의 반응을 살핀다. 웃음 포인트는 매번 다르지만, 시각장애 관객이 느낄 ‘왜 웃지?’라는 궁금증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거창한 구원이나 예술은 아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으로서 소외감 없이 다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 딱 그 정도의 배려면 충분하지 않을까.

 

- 96쪽

 

 

앞서 이 작업이 타인의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의 연속이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의 대본이 완성되기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고민들이 가득했다. 저자는 쉴 새 없이 대사가 이어지는 코미디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찰나의 순간에 맞춰 비언어적인 유머와 표정, 몸짓을 음성으로 묘사해야 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타이밍을 재고 단어를 고르는 이 까다로운 과정 속에서 저자가 중심을 잡았던 원동력은 결국 ‘소외감 해소’라는 본질이었다. 콘텐츠를 평등하게 향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세심함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저자가 이 직업에 필요한 요건으로 글쓰기와 분석력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따뜻한 마음’을 꼽은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단어 하나를 바로잡고 찰나의 표정을 소리로 번역하는 이 모든 수고로움의 바탕에는 결국 타인의 자리에 서보려는 다정한 시선이 존재한다. 모두가 소외 없이 같은 타이밍에 웃고 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어쩌면 타인의 외로움을 먼저 읽어내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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