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리뷰] 책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이 전하는 문화예술 접근성의 미래

모두를 동등하게 환대하는 번역의 세계

by 신동하 에디터
2026.07.19 14:53

 

 

# 글을 열며,


   

시각 정보를 음성으로 전달하는 음성해설을 단순히 화면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낭독 서비스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음성해설은 고도의 미학적 사유와 정교한 언어적 조율을 거쳐 수행되는 일종의 감각 번역이다.

 

눈으로 보는 입체의 세계를 귀로 듣는 선형적인 언어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이 복잡한 번역의 최전선에는, 지난 20여 년간 국내 문화예술 현장의 접근성을 맨땅에서부터 개척해 온 음성해설 작가 서수연이 있다.

 

서수연의 저서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그가 2003년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음성해설을 맡으며 첫발을 내디딘 이래, 약 7,800편의 작품을 거치며 쌓아 올린 치열한 기록이다. 이 책은 한 개인이 개척해 온 독보적인 실무의 역사를 아카이빙하는 동시에, 우리 문화예술계가 마주한 접근성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표지평면_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jpg

 

 

 

# 서수연 작가가 정립한 음성해설 미학


 

저자가 책을 통해 상세히 증언하는 음성해설 작가의 업무는 수많은 판단과 미학적 타협이 일어나는 치열한 과정의 연속이다. 서수연 작가가 밝히는 핵심 업무는 대사와 음악이 멈추는 극히 짧은 공백 시간 안에 인물의 행동, 표정, 조명, 의상, 소품의 위치 같은 시각 정보를 문장으로 작성하는 일이다.

 

그러나 화면이 쏟아내는 동시다발적인 정보를 그 짧은 대사 사이의 틈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작가의 장면 분석력과 정보의 선별 능력이 요구된다. 선택된 정보는 다시 극도로 압축된 문장으로 정제되며, 녹음 과정에서 성우가 발음하기 까다로운 자음 충돌이나 긴 호흡을 걸러내는 수정을 거친다.


시간적 배치에 있어서 저자는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등장인물의 외양이나 무대 장치의 구조를 미리 설명해 두는 선해설과, 사건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실시간 변화를 대사 사이의 짧은 공백에 기민하게 끼워 넣는 후해설의 방법론을 정립해 나갔다.

 

정보가 너무 늦게 제시되면 청자는 사건의 원인을 뒤늦게 파악해야 하고, 반대로 너무 일찍 제시되면 극적 긴장을 무너뜨리는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장면이 정보를 공개하는 순서에 맞춰 문장을 넣는 배치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시간 조율만큼이나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대목은 표정과 감정을 설명하는 표현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다. 저자는 슬픈 상황에 놓인 인물을 두고 작가가 직접 화가 났다거나 슬퍼한다고 감정을 규정해 버리면 청자의 감상 해석을 하나로 제한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대신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굳게 다문다거나 눈가에 물기가 서서히 차오른다는 식으로 신체적 변화와 행동만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때, 청자가 그 행간에서 감정을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주체적인 감상 공간이 열린다. 이것이 저자가 수천 편의 작품을 쓰며 검토해 온 음성해설의 핵심 기술이다.

 

 

 

# 무대와 전시장으로 넓어진 감각 번역


 

책의 기록이 증명하듯 국내 음성해설은 이제 영화나 드라마를 넘어 공연과 전시 공간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 이에 따라 각 장르가 요구하는 접근성의 조건과 매체적 특성도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우선 매 회차 배우들의 미세한 호흡과 관객의 반응에 따라 템포가 달라지는 공연 예술의 경우, 해설 작가와 낭독자는 실시간 진행 상황을 상시 확인하며 정해진 위치에 정확히 문장을 넣어야 하는 현장성을 요구받는다.

 

언어가 아닌 오직 몸의 궤적으로만 이야기하는 무용 해설의 영역으로 가면 딜레마는 더 깊어진다. 무용수의 신체적 거리감이나 동작의 방향과 자세를 빠짐없이 설명하려 들면, 오히려 음악과 현장음이라는 중요한 청각 정보를 가려버려 관객의 감상을 방해할 위험이 크다. 따라서 무용 해설에서는 작품에서 반복되는 지배적인 동작 모티프를 구분하고, 작품 이해에 꼭 필요한 핵심 움직임만을 우선순위로 발라내는 미학적 결단이 작동하게 된다.


공간 예술인 전시 음성해설 역시 고유한 정보의 형태를 요구한다. 회화, 조각, 설치미술, 미디어아트는 저마다 다른 정보를 요구하므로 작가는 작품의 크기와 형태, 색상, 재료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시 공간 안에서 주변 작품들과 맺는 물리적 관계성까지 입체적으로 고려해 설명 항목을 정해야 한다.

 

나아가 시각 중심의 예술을 촉각으로 보완해 주는 터치투어의 운영 역시 중요한 접근성 서비스다. 관객이 공연이나 전시가 시작되기 전 무대와 소품, 의상, 혹은 작품의 재료를 직접 만져보며 촉각으로 확인한 내용은, 실제 관람 중 이어폰으로 듣는 음성해설과 결합하여 비로소 완전한 감각적 재구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 그러나, 극장 문턱에 멈춰 선 현실의 장벽


 

그러나 이러한 전문적인 실무 기술의 발전과 영역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실제 문화예술 생태계가 마주한 현실의 장벽은 여전히 높고 차갑다.

 

문화예술 접근성은 단순히 뛰어난 음성해설 대본이라는 콘텐츠 하나의 질로 완성되지 않는다. 장애인 관객이 공연이나 전시 정보를 탐색하는 첫 순간부터 예매를 하고, 극장으로 이동해 안전하게 좌석을 이용하기까지의 모든 단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안내 시스템은 곳곳이 단절되어 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현실은 정보와 예매의 장벽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온라인 홍보 페이지는 대체 텍스트가 없는 통이미지로 제작되어 있어 화면을 소리로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이 인지할 수 없다.

 

어렵사리 예매 단계에 진입하더라도 좌석을 마우스로 일일이 클릭해야 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나 비장애인조차 식별하기 힘든 매크로 방지용 문자 입력 시스템은 시각적 인지 없이는 결제조차 불가능하게 가로막는다.

 

겨우 이 과정을 통과하더라도 음성해설이나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공연은 전체 일정 중 특정 회차에만 제한적으로 편성되는 실정이며, 그나마 준비된 수신기 장비와 좌석의 수량마저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 장애인 관객은 작품과 날짜를 자유롭게 고르기 전에 서비스 제공 여부부터 먼저 확인해야 하는 불평등을 겪는 셈이다.

 

 

 

# 글을 마치며,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할 현실의 과제는, 접근성의 책임을 언제 누구에게 지울 것인가라는 제작 구조의 개혁이다.


현재 대다수 문화예술 현장에서 접근성 작업은 제작사가 작품을 모두 완성한 제작 극말기에야 비로소 추가적인 외주 업무로 사후 덧대어진다. 제작사가 연출 의도와 장면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지 않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음성해설을 의뢰받게 되면, 담당자는 대본을 분석할 시간도, 장애 당사자와 함께 진행하는 꼼꼼한 모니터링 및 피드백 수정 과정도 거치지 못한 채 촉박한 일정에 쫓기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담당자 개인의 추가 노동과 희생에 기댄 임시방편일 뿐이며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접근성을 작품 제작 말미에 마지못해 추가하는 보완책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기획의 첫 단계부터 당연한 전제로 설계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제작사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어떤 관객이 작품을 관람할지 검토하고, 창작자와 연출가, 공연장 운영자, 그리고 음성해설 작가가 초기 단계부터 대본과 무대 정보를 공유하는 협업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당사자가 초안과 시연본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검수 일정을 예산과 일정에 공식 반영해야 한다. 서수연 작가가 일구어낸 7,800여 편의 기록은 개인이 이룩한 숭고한 전문성의 역사인 동시에, 문화예술 기관과 제작사가 이 책임을 별도 담당자에게만 맡기지 말고 기획과 운영 과정에서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준엄한 과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관련 예산과 인력을 공식 배정할 때, 비로소 문화예술은 모든 이의 삶을 동등하게 환대하는 진정한 감각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