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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사를 했다 [공간]

그럼에도 나는 가끔 집이 사람을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by 강채연 에디터
2026.06.02 18:42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유년기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낸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막상 이사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게 될 집이라고 늘 마음 한편으로 생각해 온 탓이었다.

    

그러다 이사 며칠 전, 거실 기둥 모퉁이에서 오래된 흔적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부터 키를 잴 때마다 연필로 그어두었던 선들이다. 가장 낮은 곳에는 꼬꼬마 시절의 내 키가 있었고, 가장 높은 곳에는 지금의 내 키를 표시한 마지막 선을 끝으로 끊겨 있었다. 족히 50cm는 넘어 보이는 두 선 사이를 가득 채운 새까만 연필 자국들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내가 이렇게 자라는 동안 이 집도 나와 함께 나이를 들었겠구나 싶어서.

 

그제서야 시원섭섭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저 거처를 옮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꼭 어린 시절의 나를 통째로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된 것만 같았다. 이삿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괜스레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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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온 그 집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형제자매 없이 자란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노는 걸 좋아했다.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친구들을 데려와 종종 엄마 골치를 썩인 적도 있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달라졌으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집을 드나든 친구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뿐만이 아니다. 비록 이제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할머니도, 이제는 그리운 이름이 된 할아버지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도 모두 그 집의 시간을 함께 지나간 때가 있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지인과 잠시 용건을 보러 들렀던 사람들까지. 오랜 세월 동안 문이 수없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사이 새로운 만남과 작별들이 끊임없이 오고 갔다.

 

그중에는 지금도 연락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보고 싶어도 더는 만날 수 없는 인연도 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부족해서 놓쳐버린 인연이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인연이든. 그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공간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는 일인 동시에, 그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을 이제는 묻어둬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사를 하며 가장 아쉬웠던 것은 공간 자체보다는 그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시간과 인연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고 보내줘야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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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와 함께 보내준 것은 비단 지나간 인연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그 공간을 채운 순간들 역시 두고 와야 했다. 방학이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만화책을 뒤적이던 나른한 오후와 방문을 닫아두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이라도 품은 사람처럼 끙끙 앓던 사춘기의 밤들도,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한 시절의 풍경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기억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남기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잊기도 한다. 어떤 얼굴은 흐려지고, 어떤 대화는 희미해지며, 어떤 감정은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영상을 기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기록을 남겨도 끝내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떤 냄새와 소리, 공기의 온도와 햇볕의 따스함. 그런 것들은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온전히 기록되지 않는다.

 

반면에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한다. 어떤 장소는 단순히 공간 이상의 의미와 생명력을 지녀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장소에서 잊고 지냈던 시간과 감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곤 한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거나 오래 살던 동네를 다시 걷게 되었을 때,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불쑥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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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집은 더 이상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가구의 배치도 달라졌을 테고, 인테리어를 새로 하면서 예전의 흔적들도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매일 드나들던 현관에는 다른 사람들의 신발이 놓여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집의 모습은 오래전에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집이 사람을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집에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집 역시 우리를 조금씩 품고 기억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 집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머물며 쌓아 올린 시간은 어떤 액자 속 한 풍경으로 남아 문득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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