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허스트가 너무 많았다. 지하철 광고판에도 있었고, 스크롤 하던 인스타 피드에도 떴고, 옆에 앉은 동생도 얘기를 꺼냈다. 다음 주에 친구들과 국현미에 간다고 했다.
대충 반응하고 넘기려 했는데 “사실 난 그 사람 별로야” 하길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싫어해.”
한 번도 어떠한 미술 작품을 보고 ‘싫다’고 말한 적 없다. ‘내 취향은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리곤 했는데, 데이미언 허스트는 확실하게 싫다. 그는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찬 유리 진열장에 넣어놓거나, 소의 잘린 머리를 전시하고 구더기가 꼬이게 둔다. 그리고 이런 제목을 붙인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 유리, 채색된 철, 실리콘, 모노필라멘트, 상어, 포름알데히드 수용액, 217 X 542 X 180cm. 개인 소장.©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잔인하게 죽은 상어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죽겠는 것은 딱히 아니다. 어제도 연어를 샀고, 평소에도 회를 자주 먹는다.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에 있다. 스시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과 죽은 상어의 사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해산물을 조롱하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요즘은 전시회장이 포토스팟으로 변질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큰 불만은 없다. 당장 나부터도 작품 앞에서 괜히 어깨를 펴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무슨 이유가 됐든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미술관이 활성화되면 좋은 작품들이 많이 들어올 것 같아서 그렇다.
하지만 사체 앞에서 포즈를 잡고 찰칵이는 사람들을 보면 ‘이게 맞나?’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어느 정도 수준이면 신경 쓰이지 않았을 지적 허영심이, 생명 경시와 합쳐지면서 노골적으로 불쾌해지는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고작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어린 소녀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카터는 촬영 후 바로 소녀를 도왔으며, 결과적으로도 사진 한 장이 많은 관심과 기부금을 불러 모았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보고 연민을 느낀 사람들이 아프리카 기아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생명을 소비한 사진은 맞지만 동시에 의미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상어는?
허스트는 첫 뱀상어가 썩기 시작하자 1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아버리고 내장까지 방부 처리된 새 상어로 교체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2006년에 교체된 두 번째 상어다. 대체 상어를 두 마리나 죽여다가 전시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사유하며 의미 없는 종류의 육식을 줄이기를 하나, 자신의 사소하고 평범한 삶이 소중함을 깨닫기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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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니지만 생명은 거창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멀쩡하게 헤엄치던 상어를 죽여서 전시할 거였다면 그에 상응하는 목적과 결과를 함께 가져왔어야 한다. 나는 데이미언 허스트가 이 부분에 있어서 명백하게 실패했다고 본다.
전시가 끝나고 남을 것은 허스트의 유명세와 사람들의 피드에 올라갈 파리 사진 뿐이다. 바로 옆에서 잘린 소의 대가리가 나뒹굴고 있는 그런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