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덧셈의 세상 속 빼기의 미학 - 박하경 여행기

글 입력 2023.06.3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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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직장도 가정도 버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잊은 채 여행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 정신없이 길을 떠난 이들은 ‘미치광이 여행자’로 불렸다. 그들은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 버릴 거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

 

- 1화, 하경의 나레이션

 


바야흐로 콘텐츠 과잉의 시대다. OTT에서는 오리지널 시리즈부터 과거 영화와 드라마들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고, 유튜버와 스트리머들이 넘쳐나고, 개인 SNS에도 챌린지 영상이 수십 개 올라온다. 쏟아지는 콘텐츠는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자본이 뒷받침되는 장르의 다양화는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가 있는 자극적인 콘텐츠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지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피로도는 어쩔 수 없다.


더하는 데 치중한 콘텐츠들 속, 오랜만에 ‘빼기’를 선택한 콘텐츠가 있다. 웨이브 오리지널 <박하경 여행기>. 이 드라마는 분량부터 남들보다 뺐다. 한 편에 20분 남짓한 미드폼 형식은 부담을 줄여준다. 지대한 갈등이나 거대한 욕망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우리가 한 번쯤 느껴봤을 자그마한 욕망, 예를 들어 돌탑을 보고 ‘무너뜨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들이 주된 내용이다.


여행은 보통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 떠나곤 한다. 추억을 더하기 위해, 경험을 더하기 위해. 그러나 제목에 ‘여행기’를 붙였음에도 박하경은 여행을 더하기 위해 떠나지 않는다. 그저 떠난다. 대단한 목적이나 의미 없어도 발 가는 데로 떠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여행에서 느낀 깨달음은 일상을 뒤바꿀 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러나 올라갈 때는 돌탑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내려올 때는 돌탑에 돌 하나 더 쌓을 정도의 변화는 겪는다.


사실 현실은 오히려 이런 순간들로 채워진다. 여행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거나, 인생 전체를 관통할 만한 감동이나 깨달음을 얻는 여행은 드라마나 영화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만큼의 영향력 있는 경험이 없다고 해서 삶에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여러 작은 순간들의 느낌표들로 풍부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하경의 잔잔한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특히 이 드라마는 주인공 박하경을 비롯해 캐릭터들의 매력이 상당하다. 매회 박하경은 새로운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있을 법하지만, 특색 있는 캐릭터 속에서 하경은 중심을 잡아준다. 하경이 만나는 캐릭터는 추상적인 단어를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하다. 인내, 꿈, 설렘, 세대 차이, 추억, 거리감, 유년 시절, 그리움.


1화에서 명랑해 보이던 진영 보살은 명상 시간에 홀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묵언수행자는 탁 트인 산의 절경을 바라보며 비로소 “이제 좀 살겠네” 하고 내뱉는다. 각자 어떤 짐을,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혼자 인내하고, 체화하고, 한 번쯤은 터뜨리기도 하고, 그러나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살고. 각자만이 가진 상처와 그에 대한 인내를 슬프지 않고 구차하지 않고 산뜻하게 느낄 수 있었다.


2화에서 박하경의 제자 연주는 하경은 기억도 나지 않는 말에 위로를 받고 예술에 전념하게 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라파 라구라구!’라는,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대사로 예술을 표현한다. 연주의 친구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가 내 따귀를 때려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친구, ‘작품이 이게 뭐니?’라며 비난하는 친구, ‘선생님이 꿈을 깨뜨려 주세요’라고 뒤에서 안 될 거라며 비아냥대는 친구. 어쩌면 꿈을 가진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들일 것이다. 불안, 자책, 두려움. 그럼에도 연주는 예술을 선택한다.

 

 

너 평생 니 상처만 파먹고 살 거야?

응 그럴 건데? 맛있으니까.

 

- 2화, 연주와 친구의 대화

 

 

3화의 창진은 괴짜 같지만 간질거리는 설렘 그 자체이고, 4화에서 만난 꼰대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주려고 했던 김부각 봉지를 건네주며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5화에서 만난 어릴 때 사랑했던 만화의 작가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6화에서 우연히 만난 동료 미술 교사는 편안하지만 어색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7화의 꼬마와 그 꼬마를 따라가는 여정은 어릴 적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기도, 아이의 순수함을 느끼게도 한다.


 

언젠가 만나겠지? 영화는 계속되니까.

 

- 3화, 창진이 우리와 눈을 마주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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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에서 박하경이 만나는 대상은 옛 친구인 진솔이다.


 

진솔 : 박하경 할머니. 보고 싶네.

하경 : 치, 나도 이진솔 할머니 보고 싶었는데.

 

- 8화, 진솔과 하경의 대화

 


고등학교 때 함께 수학여행 왔던 경주의 유적지를 함께 돌아보며, 하경은 진솔을 다시 마주한다. 과거의 시간이 머물러 보존되어있는 유적들 사이에서 과거의 옛 친구를 마주하며. 하경은 담담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진솔과 대화하고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뭐가 나아진다기보다는, 그냥 그다음 단계가 온다’는 깨달음을 말하며, ‘어른은 못 되고, 그냥 늙는 거지’라고 말하는 하경의 담대하고도 섬세한 마음에. 우리는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감동의 울림을 느낀다.


박하경의 여행기는 새로움을 밖에서 찾지 않고 내 안에서, 내 마음에서 찾는다. 새로운 것을 더하고 살을 붙이며 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오히려 덜어내기와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하는 것. ‘미치광이 여행자’로 보이지만 사실 가장 현실적인 여행자인 하경이 우리에게 주는 담백한 깨달음 아닐까. 깨달음마저 ‘박하경 여행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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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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