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가 2026년 5월 22일부터 6월 7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으로 돌아왔다. 연극은 2023년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얼룩말 ‘세로’의 탈출 사건을 모티프로 인간과 동물,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무대를 그린다.
마트료시카, 죽음 혹은 연대
연극이 시작하기 이전에, 무대가 먼저 시작한다. 무대 뒤편의 짚 더미에서 한 인간은 끊임없이 게임을 한다. 밀짚 앞 소파에는 두 인간이 앉아서 감자칩을 까먹는다. 우적우적, 눈은 가상의 텔레비전인 관객석에 맞춘 채 감자칩을 입에 쑤셔 넣기에 바쁘다. 감자칩을 15분은 먹었을 때야, 객석 조명이 어두워지며 연극은 마침내 시작한다. 몇 가지 대화를 나누던 둘은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세로’의 소식을 뉴스로 본 뒤 자지러지게 웃는다. 누군가의 탈출, 도망 혹은 해방일지도 모르는 것이, 네모난 상자로 접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일이면 잊을 해프닝일 뿐이다. 넷플릭스 시작음과 함께 얼룩말 세로와 하얀 양 하나가 무대에 등장한다.
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총 4장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1장부터 4장까지, 매번 새로운 양 혹은 인간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1장 양의 탈출 사건과 꿈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1장의 양은 목장에서 탈출하여 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동물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세로를 만난다. 1장의 양과 세로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에게 유흥과 털과 살, 마침내 내장, 그러니까 모든 것을 줄 수밖에 없는 삶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이 밀어주지 않으면 끊임없이 자라나는 털로 고통받을지라도 인간을 위해 살지 않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나 세로는 인간들에게 생포되었고, 1장의 양은 트럭에 치여 죽는다.
1장의 양은 죽었지만, 그의 기억은 다른 양에게 계속 전승된다. 1장 양의 꿈을 꾼 양 혹은 사람은 이전과 같이 살지 못한다. 인간의 기만에 대해 자각하고 탈출을 기약하게 된다. 그렇기에 1장에서 3장까지의 전개는 마치 마트료시카와 같다. 앞선 장은 반복하지만, 기억은 변형되고 선택은 각자 다르다. 이를테면 2장의 양은 1장 양의 대사를 반복하는 동시에 해방에 대하여 더 깊이 사고한다. 그러나 탈출을 결심한 밤에 검은 양에 의해 살해된다. 3장의 양은 조금 더 오래 산다. 3장의 양은 당장의 탈출을 도모하기보다 인간에게 털을 내어주지 않는 데에 더 집중한다. 그러나 결국 동물 보호 단체에 의해 억지로 기른 털을 밀린다.
마트료시카는 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의 2장 제목이기도 하다. 마트료시카를 본 적이 있는가. 어렸을 적 집에 있던 마트료시카 인형은 어딘가 공포스러웠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모르겠는 눈빛도, 강렬한 원색의 색감도, 어디까지 인형이 반복되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도, 공포를 자아냈다. 연극에서는 한 장이 마무리될 때마다 1장의 양을 죽음에 이르게 한 트럭 경적이 울렸다. 한 세대에서 그다음의 양에게 기억이 전승되기 위하여 각 장의 양은 죽어야 했다. 죽어도, 죽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지 한 마리의 양이 다른 양들과 다른 생각을 해서 자신을 괴롭게 만들어야 했다는 것 외에는. 그렇기에 1장에서 3장까지 계승의 과정은 해방을 위한 양의 집단 연대일 수도 있으나, 죽음의 과정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둘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다시, 다시
4장에 이르러서 양의 기억은 인간에게 계승된다. 기억을 전승받은 인간은 검은양 행세를 하며 ‘언더커버양’으로서 양의 무리에 숨어있던 자였다. 2장의 양을 살해한 인물이기도 했다. 양의 기억을 전달받은 인간은 자신이 죽인 양이 가진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 혼란을 느낀다. 마침,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쑥대밭이 된 목장에서, 인간은 양으로 계속 사는 것이 아닌 도시로 가 인간 역할로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여러 가지의 삶을 살아본다.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취업이 되지 않는 청년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했지만 사업을 하다가 망한 청년으로, 비트코인을 하다가 파산한 청년으로. 또 전쟁으로 팔과 다리를 잃은 누군가로.
탈출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에는 얼룩말 세로와 양 몇 마리의 탈출이 등장한다. 그러나 세로도, 양도 알고 있다. 감금이라는 것은 물리적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를테면 얼룩말은 관람용으로, 눈에 잘 띄고 값비싸기 때문에 울타리를 나서자마자 생포가 된다. 반면 수백수천 마리가 한 번에 관리되는 양의 경우, 수색 비용을 들이는 것이 손해가 되어 몇 마리의 탈출 정도는 주인이 감수한다. 동물원과 목장, 인간이 정해준 동물의 영역을 한 발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그들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스스로는 음식을 구할 수 없고, 인간의 땅을 벗어날 수도 없다. 탈출은 해방이 되지 않는다. 탈출은 자유를 담보하지 않는다.
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이러한 비인간에 대한 시선으로 인간을 되비춘다. 보이지 않는 우리에 갇힌 인간상을 조명한다. 4장에서 검은양이었던 인간은 한 번의 삶을 살 때마다, ‘NG예요. NG!’라는 대사를 반복한다. 어떻게 살아도 불행해지는 삶 앞에서,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는 삶 앞에서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삶을 시도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좌절뿐이다. 즉, 우리에 갇힌 삶은 분명 자유롭지 않지만, 우리 밖으로 탈출하는 것 역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거부라는 방식으로 구조에 다시 종속된다. 연극에서 인간은 다시 양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며 목장에 드러눕는다. 그러나 연극의 마지막에서 세로는 ‘다시, 다시!’를 반복하여 외친다. 도망칠 곳은 없고, 도망치더라도 다시 잡힌다는 사실을 알지만, 세로는 다시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무대가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 마치고 나서도 무대는 계속되었다. 모든 관객이 나갈 때까지 세로는 ‘다시’를 외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다시 거쳐도, 마트료시카와 같이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마리의 양과 인간은 최초의 양이 경험했던 해방의 꿈을 다시 꾸게 될 것이다. 딱 거기까지, 연극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