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프렐류드 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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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극 '아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본집이 더 좋은 연극이 있고, 실제 상연된 작품이 더 와닿는 연극이 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대개 텍스트가 작가의 고민으로 꽉 들어찬 작품은 대본집을 읽었을 때 의외의 면을 찾을 수 있다. 반면 인물 자체가 공감가고 재미있으며, 긴장과 감정이 도드라지는 작품에서는 공연 상연 중인 배우의 시너지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아트’를 보았을 때, 아트는 명확히 후자에 속했다.
세르주, 이반, 마크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절친한 친구들이다. 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냈고,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세르주는 5억짜리 ‘흰’ 캔버스로 보임직한 그림을 구매하는 게 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트’의 대본집을 읽었을 때 나는 세르주와 마크의 관계에 집중했다. 그림을 산 세르주와, 그게 못마땅한 마크. ‘두 사람은 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는가’ 라는 서사에 집중하며 흰 캔버스가 전달하는 의미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러나 연극을 보았을 땐 그 두 사람보다 이반의 역할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대본집에서 이반은 상대적으로 흐릿한 인물이다. 그는 그림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 발 물러서 있고, 두 사람만큼 강렬하지 않다. 이반은 내내 그림과는 다른 일상을 이야기하며, 그 논쟁에 끼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희곡에서 나는, 이반이 왜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끼어있는지 의문이었다. 우유부단하고, 뭐든 좋다는 식으로 상황을 넘기고자 하는 태도는 그의 자아를 더 희미해보이게 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달랐다. 연극을 보고서는 이반이 아트의 흰 캔버스와 같은 본질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흐릿함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에 대해 열정적으로 다루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는 줄어든다. 체력 뿐 아니라 그 논쟁의 중심에 서는 일이 점점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좋은게 좋은 거’라는 마인드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서로의 가치관에 쉽게 개입하지 않게 된다.
이반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는 백색의 태도로 일관하며 누구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세르주와 마크의 논쟁이 격해질수록, 이반은 더 이상 중립에 머무르지 않는다. 청첩장에 이름을 넣고 빼는 것 조차도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이반은 그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차 큰 의견을 내놓고 감정을 터뜨린다.
대본집에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감정선이 무대에 구체화 되었을 때, 나는 이반이 왜 이 관계에 들어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반은 이 관계에서 만큼은 자신의 불안과 우유부단함을 숨기지 않고 충분히 본인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모든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는 이반이, 세르주가 산 그림을 보고 사실 고작 흰 캔버스라 생각했다며 허심탄회하게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사람의 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보이지 않는 신뢰가 기반되어 있다.
흐리멍텅 특색 없어보이는 이반은 세 사람 사이에 놓였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5억짜리 그림의 가치처럼 인지할 수 있었다.
스키타는 사람
5억으로 불붙었던 세르주의 그림, 그리고 세 사람의 관계는 결국 마크의 낙서로 일단락된다.
세르주 소유의 그림, 이반 소유의 보드마카, 마크의 그림 이 세 가지가 엮은 작품 ‘스키타는 사람’은 세 사람의 우정을 다시 한 번 묶어 놓는다. 흰 눈 위로 스키를 타고 미끄러져가는 그림은 스키날로 헤집어지더라도 다시 눈이 덮이며 회복될 그들의 우정과 닮았다.
언젠가 대본이 출판물로는 메리트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희곡 또한 텍스트의 일부로 기능하는데, 왜 그런 인식이 생겼는지 늘 궁금했다. 연극 ‘아트’를 통해 그에 대한 의문을 일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종이에 인쇄된 문장이 침묵, 호흡 등의 감정으로 살아났을 때 텍스트는 또 다른 감정의 밀도를 얻는다. 종합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을 때 더 빛날 수도 있는 연극 대본의 성격이 마치 연극 ‘아트’ 속 세 인물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는 듯 느껴졌다.
각자만 놓고 보면 불완전해보일 때도 있지만, 함께할 때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