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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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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 :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PLAY'라는 단어가 일러주듯, 연극의 근본적인 속성은 '놀이'에 있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한바탕 놀이다. 사실 무대가 없어도 괜찮다. 어린 시절 자주 즐기던 소꿉놀이는 어쩌면 우리가 최초로 경험하는 연극일지도 모른다. 연극이 다루는 놀이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출하고 인간의 삶을 모방하며 다양한 효과를 창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트렁크씨어터프로젝트의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 :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조예은 작/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26.04.25.~05.03.)는 연극이 가진 '놀이'와 '모방'의 속성을 영리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김치찌개 웨스턴>이 관객을 초대하는 방식


 

제목부터 강렬한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 : 밥주걱과 45구경 권총의 결투>(이하 <김치찌개 웨스턴>)의 재기발랄한 내용보다도 먼저 관심을 끈 건 접근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극 중 등장하는 다양한 소도구가 전시된 짤막한 코너를 돌아 내려가면, 공연장 로비에서 접근성 테이블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관람 전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테이블로, 관객은 그곳에 비치된 소품이나 소도구를 통해 공연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가까이서 살펴보며 설명까지 들을 수 있다. 이외에도 소음에 민감한 관객을 위한 귀마개나 스트레스 볼을 제공한다는 점 역시 인상 깊었다. 사전에 음성 소개 영상을 제공하며 공연 개요나 무대 디자인, 의상 등에 관한 시각적 요소를 마음껏 상상하게 한다는 점도 좋았다. 접근성 매니저가 공연장에 상주하고, 동반 관람을 운영하며 이동 지원 스태프가 존재한다는 점도 기억에 남는다.

 

 

<김치찌개 웨스턴> 음성 소개 영상

 

 

 

요란한 제목만큼 요란한 공연


 

제목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르코예술극장을 지나가다 마주친 이 강렬한 빨간색 포스터에는 <김치찌개 웨스턴>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고, 호기심이 동해 금방 예매까지 하게 되었다. 김치찌개 웨스턴이라. 이 연극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서부극을 떠올리게 하고, 이어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발전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김치찌개 웨스턴>은 결국 한국식 클리셰를 집약한 새로운 서부극일 터다.

 

객석에 앉기 전, 관객은 자리에 준비된 오페라글라스를 받게 된다. 오페라글라스가 필요한 이유는 공연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형극' 때문이다. 작은 인형이나 소도구를 살피기 위해서는 오페라글라스가 필요했고, 이게 모두에게 제공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로비에서부터 객석까지 이어지는 체험들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런 게 연극이지.' 객석에 앉아 무대에 오른 배우를 지켜보는 행위만을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요란한 제목만큼 요란한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처럼,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 결국 연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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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다채로운 대소도구를 구경하게 된다. 투박하게 생긴 선인장과 의자, 그리고 악사 자리에 준비된 여러 악기들까지 면밀히 살피면서 무대를 즐기다 보면 어느덧 공연이 시작된다. 네 명의 배우가 무대에 등장할 때까지도 객석등이 켜져 있어 관객과 배우 간의 거리는 몹시 가깝게 느껴진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배우들은 이 극의 배경과 인물을 설명해 준다.

 

극 중 배경은 솔저마운틴 주에 속한 사우스폰드 평야의 마을, '뉴 밀리언 골드타운'이다. 농경지 확장을 위해 간척사업을 시행한 이후로 마을에 흐르던 강물은 서서히 말라가고, 공용 우물마저 동이 나 버렸다. 마을에 남은 마지막 물길은 오직 '에슐리 퀸즈'의 땅으로만 흐르는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시작된다. 대체적인 배경 소개를 마친 배우는 이런 대사로 연극을 출발시킨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선과 악이 모호한 지점이 있다고.

 

스파게티 웨스턴은 서부극의 개척정신을 잔혹함과 폭력성으로 끌어오고,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인물상을 탐욕으로 점철되도록 그렸다고 한다. 총잡이 탕아 역시 거창한 목표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로 바뀌었다.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의 총구가 겨냥하는 곳도 바로 그 지점이다.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표방하며 잔혹성과 폭력성을 다루고 선과 악의 모호함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 그리고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진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일.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그제야 객석등이 어두워지고 비로소 막이 오른다.

 

 


익숙한 이 맛은... 역시 김치찌개구만


 

인형극으로 출발하는 공연은 물이 동나서 괴로워하는 주민들과 그들을 착취하는 에슐리 퀸즈의 모습을 비춘다. 그런 주민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에드먼드 퀸즈의 모습까지 지켜보고 있노라면 슬슬 익숙한 냄새를 맡게 된다. 그렇다. 이 연극은 한국의 전래 동화 '흥부전'의 구성을 가져간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놀부를 에슐리에 대응시키고 선한 동생 흥부를 에드먼드에 대입하는데, 우연히 부모의 유언장을 발견한 에드먼드는 에슐리의 땅이 사실은 자신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크게 분노한다.

 

흥부전을 차용한 점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총잡이 J.B.의 존재다. 황폐한 마을에 철새처럼 등장한 전설적인 총잡이 J.B.는 마을 주민 중 하나인 '잭 솔로'가 운영하는 살롱에 들어가 위스키를 얻어먹는다. 그때, 잭 솔로가 그의 다친 다리를 치료해 주자 J.B.는 은혜를 갚겠다는 듯 박씨 대신 총알 하나를 건넨다. 결국 J.B.는 제비의 현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총알 하나는 극 후반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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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토리뿐만 아니라 지명을 통해서도 힌트를 던진다. 솔저마운틴 주에 속한 사우스폰드 평야의 마을 '뉴 밀리언 골드타운'이라. 이 극이 사실은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한 자연 파괴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돌이켜 보면, 왜 '뉴 밀리언 골드타운'이라는 지명이 등장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뉴(새)' '밀리언(만)' '골드(금)' 타운이라니. 그에 덧붙여 새만금과 군산의 관계를 떠올리면 솔저마운틴이라는 지명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솔저(군)'와 '마운틴(산)'의 조합이니까. 또한, 사우스폰드는 남쪽을 뜻하는 South와 호수를 뜻하는 Pond를 섞어 호남 지역을 칭하는 언어유희로도 보인다.


마을로 흘러들었던 골드리버가 군산으로 흐르는 금강을 뜻한다면, 결국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은 이익에 눈먼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망가진 자연. 즉 새만금 간척 사업의 폐해를 서부극의 형식으로 끌고 와 풍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흥부전을 패러디하면서 김치찌개 같은 익숙한 맛의 한국식 서부극을 완성해 낸 것이다.


 

 

다채로운 연출로 한계 돌파하기



이렇듯 풍자와 패러디가 가득 담긴 한국식 서부극 <김치찌개 웨스턴>의 서사 구조는 다소 전형적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르적 공식이나 한국식 플롯인 흥부전을 차용하며 관객이 쉽게 결말을 예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적 한계를 다채로운 연출적 양식을 통해 영리하게 돌파한다. 공연 속 무대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 가며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가장 먼저 펼쳐지는 건 테이블 위에서 그리는 아기자기한 인형극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거대한 비극을 소꿉놀이로 축소시키며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온몸을 다해 인형극을 진행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연극이 가진 '놀이'의 성질을 다시금 일깨우는 것은 물론이다.

 

배우가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와 노래, 그리고 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인형에서 배우로 포커스가 전환되는 순간 몰입도는 높아지고, 작은 테이블 위에 머물던 인물들의 욕망은 배우의 에너지를 받아 폭발하며 극장 전체를 채운다. 관객들은 어느새 배우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동화되어 척박한 황야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극적 체험을 하게 된다. 빛과 실루엣이 교차하는 그림자극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림자극은 우화적인 느낌을 극대화하며 독특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나아가, 이 극은 뮤지컬이 가진 장르적 특성을 정면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뮤지컬은 '인물이 갑자기 노래를 한다'는 특성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김치찌개 웨스턴>은 바로 그 어색한 지점을 짚어내며 극적 장치로 활용해 웃음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장치는 결국 연극의 놀이적인 속성을 극대화한다. 익숙한 이야기를 뼈대 삼아 무대 위에서 구사하는 다양한 종류의 연극적 놀이를 통해 관객의 시청각적인 체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한편, <김치찌개 웨스턴>은 반복이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관객을 설득한다. 이 연극에 완전히 동화된 순간부터는 배우가 그냥 무대 위에 서 있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사실 이런 코미디는 가장 쓰기 어려운 장르다. 타인을 무장해제시키고 웃음을 유발하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길을 택한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은 유머로 관객을 설득하는 한편 다채로운 연출로 선명한 연극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물이 모든 걸 덮어버립니다


 

금 같은 물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벌어진 마지막 결투는 다소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에슐리 퀸즈와 에드먼드 퀸즈 남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총잡이 J.B.는 오직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며 총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와중, '잭 솔로'가 등장하여 마지막 승리자를 총으로 쏘아 버린다. 뒤이어 인간들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골드리버가 터지면서 마을을 뒤덮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마무리다. 마구잡이로 싸움을 일으킨 권력자들의 목숨을 거둔 자는 핍박받던 평범한 소시민이고, 그 직후 마을을 뒤덮은 강물의 범람은 이 세계의 진정한 신이 대자연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자본을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게 싸우던 인간의 탐욕은 걷잡을 수 없는 범람 앞에 부질없고 오만한 소꿉놀이로 전락하며 짙은 허무함을 안긴다.


 

 

후련하고 통쾌함! 이 반가운 감각


 

연극 <김치찌개 웨스턴>은 '놀이'와 '모방'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발산하며 연극성을 증명한다. 이 극의 가장 큰 매력은 무대 위 인물들이 한 땀 한 땀 빚어내는 '수제 연극'이라는 점에 있다. 무대 한편에 자리한 악사는 극 전체의 효과음과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며, 배우가 직접 무대 조명을 조작하기도 한다. 일일이 손으로 옮기는 소품이나 장면의 전환은 이렇게 무대 위에서 놀면서 만드는 이야기가 연극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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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더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서부극의 패러디, 그리고 흥부전을 차용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씁쓸한 풍자를 담아낸 대목은 연극이 가진 모방의 성질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무거운 현실을 가벼운 놀이로, 비극적인 쟁탈전을 우스꽝스러운 모방으로 빚어낸 이 소꿉놀이 같은 판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관객석 전체가 웃음으로 들썩이는 경험도 참 오랜만이었다. 거침없는 코미디의 문법을 보여주면서도 끝까지 연극성을 쥐고 가는 뚝심이 돋보이는 극이었다. 간만에 온전한 즐거움을 느끼게 한 무대를 만나니 그저 후련하고 통쾌했다. 연극이 주는 이 짜릿한 감각이 참으로 반갑고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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