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To. 5월을 지나는 모든 분들께
꽃은 좋은데 꽃놀이에는 딱히 감흥이 없습니다. 굳이 멀리까지 보러 안 가도 섭섭하지 않달까요. 계기는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산책로에 있는 몇 그루의 벚꽃나무를 덤덤히 훑는 것으로 올해의 벚꽃 구경을 퉁쳤습니다. 그간 실컷 봤고, 뭐 작년에도 안 갔으니까 이번에도 패스한다 이런 관성으로 말이죠.
저의 봄은 어쩌면 어영부영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저에게 뜻밖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겹벚꽃’을 보러 가자는 지인의 즉흥적인 제안 덕분에요. “겹벚꽃?” 저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겹벚꽃은 여러 겹의 꽃잎이 겹겹이 쌓여 동그란 구의 모양을 하고 있는 아주 퐁실퐁실하고 탐스러운 꽃인데요, 일반 벚꽃보다 1~2주 늦게 피는 것이 특징입니다. 벚꽃이 져도 한 번 더 볼 수 있는 셈이죠.
겹벚꽃이 가장 예쁘다는 4월 말. 별 생각 없던 사람에게 얼렁뚱땅 두 번째 꽃구경 티켓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겹벚꽃의 성지라는 충남 서산의 문수사로요. 출발하는 아침, 꽃구경에 덤덤한 사람 치고 제일 좋아하는 간장계란밥을 신나게 만들어서 도시락 통에 담았습니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요. 가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간식도 샀습니다.
그쵸? 나에게 좋은 건 남에게도 좋죠. 차가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였습니다. 이대로는 절 초입까지 무리겠더라고요. 중간쯤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간식을 넣은 아이스박스를 달랑달랑 손에 들고서 수많은 차들을 헤쳐 나갔어요. 좋은 풍경과 함께 평온한 점심 식사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넘치는 인파로 앉아 있을 자리조차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한적한 장소를 물색하게 됐습니다. 꽃터널 아래에서 인생샷을 빠르게 건진 다음 절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죠.
절에서 떠밀리듯이 나와 조금 헤매다 최적의 자리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겹벚꽃이 듬성듬성 심긴 아담한 놀이터 하나.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간장계란밥과 귤과 과자를 먹었어요. 머리 위로는 꽃이 무거워 허리가 휜 겹벚꽃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요. 처음 만난 이 꽃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듯 감상한 것 같네요. 꽃은 언제 봐도 좋은 거란 걸 간과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닌 척했는데 속으로는 이 순간을 무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렇게 놀이터 한 켠을 전세 낸 것처럼 실컷 독점했습니다.
까짓거 바다도 보러 갔습니다. 공원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고상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의 바다를 바라보던 제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갈매기한테 새똥을 맞았습니다. 정확히 이마에 떨어졌고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저였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새똥 테러를 당한 저는 기가 차서 허허 웃다가 갈매기의 명중률이 새삼 감탄스러워졌어요. 그러다 꽤 비장한 마음으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박...로또 사야 돼!”
며칠 후 저는 로또를 샀습니다. 새똥 이슈의 기운을 싹싹 끌어 담아서요. 즉흥 꽃놀이의 엔딩이 복권 당첨이라면 얼마나 황홀할까요. 아쉽지만 꽝이었습니다. 그래도 흐지부지될 뻔했던 계절에 마침표만큼은 제대로 찍은 기분이었어요.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봄이지만 또 한 번 연장된 봄을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뒤늦게 만난 겹벚꽃 덕분에 그간 생략했던 꽃놀이를 몇 배는 더 응축해서 즐겼네요.
‘보너스 스프링’. 저는 지금 이 글에 딱 떨어지는 제목을 짓고 흡족해져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겹벚꽃을 구경했던 날이 아주 약간의 계기가 됐달까요. 저는 제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 생각을 무시할 때도 많아요. 늦었어도, 놓쳤어도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채우면 되고, 그럴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확신하고 있거든요.
반드시, 꼭, 그래야 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벚꽃 못 보면 겹벚꽃 보면 되죠. 남은 5월도, 돌아올 봄도, 앞으로의 무수한 계절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보다는 충만한 만끽으로 넘쳐나길. 그래서 종종 찾아올 보너스 같은 일도 두 팔 벌려 환대할 수 있길.
From. 에디터 한세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