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에는 유독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어린이날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생일이 있어서 어렸을 적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냈던 생일날들이 종종 떠오르기도 한다. 이번 어린이날에는 문득 초등학교 저학년 때 썼던 일기들이 생각나 찬찬히 읽어 보았다.
일기에 썼던 일들이 기억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하지만 내용을 읽다 보니 '이걸 정말 내가 썼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생경한 내용과 문장들이 있었다. 지금은 당시 나이보다 몇 배는 더 살았지만, 다시는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히 나 자신이지만 어쩐지 잘 모르는 꼬마처럼 느껴지는 그 시절의 문장들을 따라가 보며 조그마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좋아하는 동물 3위

8월 5일 금요일
가족들과 대관령 양떼 목장에 갔다.
산에 올라가면서 물도 마시고 양도 보았다.
책에서 본 양은 털이 하얬는데 실제로 본 양털은 좀 달랐다.
양한테 건초를 줘본 느낌은 간지럽고 부드러웠다.
산을 올라갈 때는 힘들고 다리가 아팠지만 양들을 봤을 땐 뿌듯하고 힘이 났다.
양들은 모두 책에 나오는 양들처럼 귀여웠다.
내가 3위로 좋아하는 동물이 양이다.
책에서 본 양털과 달랐다는 건 아마 생각보다 양들이 꼬질꼬해서였을 테다. 새하얀 목화솜 같은 털을 기대했지만, 건초나 먼지가 엉겨 붙어 때가 탄 양을 보고 실망한 모양이다. 이 일기에서 웃음이 터졌던 대목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3위로 좋아하는 동물이 양이라니, 양떼 목장에 갔던 경험이 어지간히도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동물 1위, 2위는 어떤 동물이었을까? 초등학교 시절 취향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1위는 토끼일 텐데, 2위는 대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위, 2위는 혼자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일기에는 제대로 써놓지도 않은 게 참 초등학생답다.
짬뽕이 다 같은 짬뽕이지

9월 20일 화요일
안경에 기스가 너무 많이 나서 안경점에 갔다.
안경알을 바꾸고 나니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잘 보였다.
기스가 안 났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스케줄이 다 끝난 뒤 짬뽕을 먹었다.
어른들은 이 집 짬뽕이 맛없다 맛있다 이러시는데 나는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까?
이제부터는 안경을 소중하게 다루고 기스 내지 말아야겠다
안경알을 바꾼 후 선명해졌다는 얘기를 적었다가, 문득 너무 당연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기스가 안 났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라고 성의 없이 덧붙인 문장이 묘하게 맥이 빠져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건 꽤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 했던 생각인데, 유독 가게 별로 편차가 크지 않다고 느껴지는 음식들이 있다. 어린 나에게는 그 중 하나가 짬뽕이었다. 결국, 어른(?)이 된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차이를 알게 되었다. 어린이 조은서의 궁금증 하나 해결 완료.
나중에 크면 뭐가 될지 되~게 궁금

10월 27일 수요일
나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런데 오늘 꿈이 또 생겼다. 그 꿈은 <파티시엘>이다.
왜냐하면 만화에서 케이크 만드는 게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중에 크면 뭐가 될지 되~게 궁금하다.
나중에는 멋진 직업이 돼서 유명하게 됐으면 좋겠다.
100%로 확신하는데, <꿈빛 파티시엘>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 꿈을 키웠을 것이다. 당시 동년배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애니메이션이라 나처럼 파티시에를 꿈꾸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어렸을 때는 디자이너, 파티시에처럼 시각적으로 뭔가를 만들고 꾸미는 직업들을 주로 꿈꿨었다. 어느 순간에는 글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런 시각 예술에 흥미가 남아 있기는 하다.
마지막 문장은 지금의 가치관과는 너무 달라서 조금 놀랐었다. 솔직히 지금은 부유해지는 건 바라도 유명해지는 건 전혀 바라지 않는데, 멋진 직업을 가져서 유명해지고 싶다니. 유명해져서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유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별생각 없이 적은 문장일 수도 있지만 그 초등학생의 머릿속이 너무 궁금하다.
왜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릴까?

11월 17일 수요일
(중략)
그런데 되게 궁금한 것은 다른 음식은 좀 먹다 보면 질리는데 계란 프라이와 짜장면은 왜 안 질릴까?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 텔레비전을 조금 본 뒤 숙제를 했다.
이제부터 짜증이 날 땐 짜장면을 생각해야겠다.
자장면이 맞는 표현임
나중에 자장면도 질릴 텐데 밀가루 음식은~
'그런데 되게 궁금한 것은'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적은 게, 계란 후라이와 짜장면은 질리지 않는다는 말이라니. 너무 어린 내가 할 법한 생각이라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적부터 입이 짧고 편식이 심한 편이라 부모님만큼이나 나 자신도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었다. 그런 와중에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으면서도 신기했을까?
담임 선생님이 써 주신 코멘트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훅 다가왔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는 표현으로 정정해 주셨는데, 아직 '짜장면'이라는 단어가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기 전이라서였다. 지금은 공적인 상황에서도 대부분 '짜장면'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당시에는 조금 어색해도 '자장면'이라는 표현이 표준어로 사용되었었다.
바람맞은 약속

12월 27일 화요일
○○○를 같이 다니는 친구와 약속을 하였다.
시간 있을 때 전화하여 만나 눈사람을 만들자고 하였지만 그 친구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너무 속상하고 섭섭하였다.
차라리 ○○○에 핸드폰을 가지고 가 전화번호를 저장해둘걸...
그래도 뭐, 배신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안에 눈사람을 만들 수는 있을까...???
어느 활동에서 만났던 친구와 눈사람을 만드는 걸 엄청나게 기대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게,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친해지고 마음을 붙였을까?
속상하고 섭섭했다고 써놨으면서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다며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이 뻔뻔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날짜를 보니 한 해가 지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안에 눈사람을 만들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 같다. 실망한 마음이 가득 묻어 있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까지 드는 일기였다.
인생의 속도에 대한 상대성 이론

11월 19일 월요일
이제 ○○○○년도 다 끝나간다. 솔직히 나의 4학년 인생도 매우 빨랐었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이 내가 지켜볼 때 더 빨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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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이 끝나갈 때쯤 썼던 일기인데, 초반부터 심상치가 않다. 나 자신의 한 해도 굉장히 빨리 지나갔지만 내가 지켜본 다른 이의 인생이 더 빨랐다, 라니. 솔직히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장이다. 10년 조금 넘게 살았던 그때 대체 누구의 인생이 그리도 빠르게 지나갔다고 느꼈을까? 1학년 때 만났던 친구들, 혹은 주변 어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던 것일까?
의미 부여를 조금, 아니 많이 해 보자면 어쩐지 그 어린 나이에 상대성 이론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었겠지만, 굉장히 심오한 느낌에 다른 일기들보다도 유독 이 일기에서 오래 멈추어 곱씹게 되었다. 하긴 가끔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면 몇 년 전 그들의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어 놀랄 때가 종종 있는데, 이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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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쓰는 일기에는 분명 나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미래의 내가 읽었을 때를 고려해서 조금 검열하기도 한다. 왜, 사람은 자신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드라마 대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초등학생 때의 일기를 읽어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 중 하나는, 분명히 담임 선생님이 검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꽤나 솔직한 감상들을 적었다는 것이다. 특히 친구와 싸웠던 이야기나 조금은 슬프고 부끄러운 일들까지 써두어서 과연 이걸 읽은 선생님의 반응은 어떠했을지도 궁금해졌다.
그때 당시의 솔직하고 순수한 면이 부럽기도 하면서, 그때보다 훌쩍 성장한 스스로가 왜인지 대견하기도 한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더니. 그건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