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상 표류기 [사람]

일상 표류 중에 발견한 작은 뗏목
글 입력 2022.08.1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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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 초등학교의 기억으로 거슬러갈 것이다. 다 쓰고 나면 동그라미 안에 검이 휘갈겨진 사인을 받거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곤 하던 그날의 기억으로. 일기를 충실하게 잘 썼다면 그 일주일간의 내 생각과 일상에 대한 선생님의 감상평이 담기기도 했다.


요새 초등학생들도 일기를 쓰나 궁금해서 초등학교 교사인 H에게 물어봤다.


“요새도 일기 검사 해?”

“왜? 다른 학교는 안 한대? 우리 학교는 아직 해.”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근데 일기 검사는 왜 하는 거야?”


답은 간단했다. 한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이해 능력을 파악하는 동시에 학교 이외 아이들의 일상에 별문제가 없는지 점검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일기 쓰라고 하면 잘 써와?”

“뭐 어디를 가나 싫다는 애들은 꼭 있지.”

“애들 일기 다 보려면 그것도 일이겠다.”

“그래도 귀여워. 아직 단순한 일에 슬프고 기뻐할 줄 알잖아.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솔직함이랑 걔네가 쓰는 단어들을 보면…아직은 내 안에 인류애라는 것이 남아있다니 다행이다. 뭐 이런 생각도 들고.”


H의 말대로 초등학생들의 일기란 참 단순하다. 오늘 학교 끝난 이후에 저녁으로는 어떤 것을 먹었다. 또 먹었으면 좋겠다. 언니와는 이런 것 때문에 싸웠다. 아프다. 언니가 미웠다. 뭐 이런 것들의 나열이다. 뒷장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꼭꼭 눌러쓴 야무지고 서툰 한글이 가득한 일기장. 내게도 그런 일기장이 몇 있다. 없는 미술 실력을 짜내어서 그렸던 그림일기부터 친구들과 어설픈 자물쇠를 달아 교환하곤 했던 교환일기, 그 날의 감정과 일과, 전하지 않을 편지 등이 담긴 지금의 일기까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일기 대신 삶쓰기를 했다. 매일 100자로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는 생활 글쓰기다. 교육청에서 시행했던 정책 중 하나였던 모양인데 100자를 꽉 채워서 매일매일 삶을 기록해오라는 숙제는 꽤 큰 원성을 샀다. 방학 끄트머리가 되면 의미 있는 삶을 보낸 척 꾸며내는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나는 그 삶쓰기에 제법 목숨을 거는 편이었다.


한두 줄 정도만 채워도 그날 치를 쓴 것으로 검사는 완료된다. 그렇지만 나는 그 넉 줄을 다 채워야지만 다음날의 일기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매일매일 일기를 쓰면 그렇게 힘들어지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아는 것들이 무조건 내 경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일기와 진짜 솔직한 내 이야기를 담은 일기를 분리해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인 것 같다. 내 일기를 누가 읽으니까. 나만 알아야 하고, 나조차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그런 날 것의 감정을 읽는다고 생각하니 솔직하게 쓸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쓰는 교환일기는 남을 웃기기 위한 에피소드를 나열하거나, 우정이 별 탈 없이 이어지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 같은 거였다.


진짜 일기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을 쓰기 시작한 것은 독립 이후부터다. 나는 정말로 내 날것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종이 일기장과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전자 일기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전자 일기는 대부분 사진일기 형식이다. 제목은 ‘일상 표류기’다. 일상을 표류하면서 얻은 사진들과 생각을 적는 일상 기록물. 수정도 쉬우니까 쓰는 데 부담은 없다. 그래서 더 게을러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네이버에서 하는 ‘주간일기챌린지’가 꽤 도움이 된다. 보상이 주어지는 마감일이 있어 제법 진심으로 참여하는 중이다. 그래서 당분간 전자 일기의 마감은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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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진짜 일기장에는 이야기들이 담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나는 어떠한 생각을 했고 날씨는 어땠고 내 옆에는 누가 있었는지, 누가 미웠고 무엇이 후회되는지. 누구한테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말들을 적는다. 일기 내용은 당연히 기밀이다. 비밀이 아니라 기밀. (가끔은 변덕에 일기를 공개하기도 한다)


H는 애지중지하는 것치고는 일기장이 너무 허술한 것 아니냐며 웃곤 했다. 맞다. 내 일기장은 평범한 노트다. 흐린 모눈이 배경으로 깔린 노트. 내게 일기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적는 게 아니라 내 하루가 다 담기는 것이기 때문에 늘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다. 마감은 따로 없이 그 순간순간 채운다.


힘들거나 생각이 많아지면 일기장을 펼쳐서 무작정 적는다. 감정들을 배설하기 위해 단어들을 나열하고 문장을 적다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가닥이 잡히기도 한다. 빠르게 치고 수정할 수 있는 전자기기와 달리 정해진 속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손을 따라 생각도 감정도 조금씩은 차분해진다.


무언가를 쓰는 것조차 힘들 만큼 지쳐있을 때면 그냥 내 일기를 한 번 읽어본다. 내 일기는 늘 불이거나 물이었다. 거세게 분노하고 힘껏 슬퍼했다. 그래서 일기는 항상 날 것의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정리되지 않고 서툰 표현들이 한차례 쏟아지고 나면 그 며칠간 내가 어떠한 순서로 회복해가는지가 보인다. 애틋하고 그리운 모습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제일 어려운 문제가 ‘나’라는 A에게 얼마 전에 일기장을 선물했다. 일기 쓰는 것이 어려워서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A에게는 그냥 오늘 있었던 일부터 써, 뭐가 맛있었음 맛있었다. 팀장이 짜증나게 굴었다. 이런 걸 써. 하고 말했다. A는 가게에 있던 볼펜을 빌려서 그렇게 적었다.

 

수빈이가 아끼는 가게에 왔다. 안주가 맛있었다. 일기장을 선물받았다. 이제 일기 쓰는 어른이 되는 거다.

 

그 위로 술잔을 몇 번 더 부딪혔고 술을 흘리는 바람에 조금 얼룩진 일기 첫 장을 가지고 A는 비틀비틀 멀어져 갔다.

 

올해 일기장이 몇 장 남지 않았다. 곧 새로운 노트를 사와야 한다. 새 일기장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적힐지 궁금하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감정을 쏟던 나는 조금 변했다. 이제는 내가 망가지지 않을 만큼만 미약하게 분노하거나 잔잔하게 슬퍼한다. 앞으로 더 변하겠지. 감정의 정도와 깊이는 달라도 여전히 나는 나를 기록하고 그리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일상을 표류하며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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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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