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내 심장을 쏴라>와 <벽오금학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왼) <내 심장을 쏴라>(2009), 정유정 지음, (오) <벽오금학도>(1992), 이외수 지음
예상치 못한 어느 절묘한 순간, 우리는 종종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존재를 만나거나 신비한 사건을 겪고는 한다. 혹은 그러한 책을 읽게 되거나.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는 표지. 다만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두 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친구와 아빠로부터 각각 추천을 받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네가 읽으면 더 깊이 와닿을 것이란 말과 함께.
그렇게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던 집 안 서가 높은 곳에서 찾아낸 책 두 권. 모두 아주 오래된 느낌이 물씬 들었다. 2009년에 출간된 <내 심장을 쏴라>와 아빠가 나오자마자 샀다던 1992년 초판 인쇄의 <벽오금학도>. 어째서 2026년에 이르러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어떤 이끌림 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묵은 책 먼지를 마시며 책장을 펼쳤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소설에 나는 곧장 빠져들었다. 각각 밤을 새워 4시간, 5시간을 내리 읽었다. 읽으며 때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벽오금학도>에 이어 마침내 <내 심장을 쏴라>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놀랍도록 글이 쓰고 싶었다. 사실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두 권의 인생 책에 관한 작은 헌사를. <내 심장을 쏴라>가 출간된 지 17년이 지났고, <벽오금학도>는 출간된 지 34년이 지났음에도, 오늘날 청춘들이 이 두 권의 책을 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그 이유를 말이다.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바친다: <내 심장을 쏴라>

<내 심장을 쏴라>(2026), 정유정 지음
<내 심장을 쏴라>는 정유정 작가의 초기작 중 하나로,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2015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초판 1쇄 이후 17년만에 리커버 개정판(2026)이 나오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로서는 부끄럽게도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의 책이었다.

영화 <내 심장을 쏴라>(2015), 감독: 문제용, 출연: 이민기, 여진구 외
책은 같은 날 같은 시간,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이유로 수리희망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된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고등학교 2학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조현병 진단을 받은 ‘수명’은 제 ‘인생에서 쫓겨난’ 그 날 이후로, 스물 다섯의 나이가 되기까지 여러 정신 병원을 전전하다 이 곳, 수리희망병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동갑내기 ‘승민’을 만난다. 미쳐서 갇힌 자가 아닌 갇혀서 미쳐가는 자. 승민은 병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에게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었기에.

‘“눈을 떠보니 이상한 곳에 흘러와 있었어. (…)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토록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었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바다로 흘러 들어온 기분이었어. 비가 내리듯 별똥별이 떨어지고 갖가지 색의 별들이 궁륭을 이루는 바다. 별들의 바다.”
(…) 처음 숲길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글라이더를 바라보던 승민의 넋 나간 눈이 떠올랐다. 새벽녘에 본 광기 어린 눈동자가 기억났다. 비행에 대한 갈급증, 조만간 닥쳐올 실명에 대한 두려움, 되풀이 된 탈출 시도. 생각들이 한길로 줄달음쳤다. 그리고 이해에 도달했다.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마지막 비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 뿐이야.”’
수명의 관점에서 승민은 도통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제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숨고 견디는 자신, 그리고 이곳의 환자들과 다른,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누릴 줄 아는 자의 눈빛.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해왔던 자의 춤. 수명은 그것에 이끌리듯 휩쓸렸다. 그렇게 ‘별들의 바다’로 가야 하는 승민의 탈출 시도를 도우며, 수명은 자신을 가두려 하는 세상의 총구를 향해 ‘내 심장을 쏴라’ 외치는 승민에게 점차 동화되었다. 아니, 멈춰 있던 제 시간 속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신화보다 현실이 몇 배나 더 신비스러울 경우가 있다: <벽오금학도>

<벽오금학도>(2010), 이외수 지음
그리고 여기, 가을날의 탑골 공원 팔각정. 하루 종일 족자통을 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는 백발의 청년이 있다. 이름은 ‘강은백’. 은백은 필연한 계기로 어린 시절 황금학이 살고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은 신선들의 마을, ‘오학동’에 당도하게 되고, 만물과 편재(遍在) 될 수 있는 그 곳에서 꿈결 같은 사흘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금학이 벽오동나무 위로 내려앉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족자 하나를 받게 된다. 이 그림 속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이를 만나면 다시 오학동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은백은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리며, 사흘 간 석 달이 흐른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소상팔경도>, 국립 진주박물관 소장
‘그는 다시금 오학동을 떠올렸다. 편재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던가. 모든 것들 속에 자신이 들어 있었다. (…) 우주만물 중에 자비롭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자비로운 것들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과도 편재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아무리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먼지는 먼지일 뿐이었으며 우주는 우주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끊임없이 그를 싸늘한 슬픔에 젖어 들게 만들었다. (…) 인간들은 편재 불능의 시공 속에서 목적을 알 수 없는 투쟁을 계속 하고 있었다.’

이외수 작
세속으로 돌아온 은백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방황한다. 여전히 머리는 하얗게 샌 채, 오학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도구, 족자통을 멘 채로. 그렇게 스무 살이 넘어 대학생이 된 은백은 보다 못한 아버지와 계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미치지 않았던 은백은 그곳에서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 ‘김도문’ 씨를 비롯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깥의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난다.
사회부적응자, 망상증 환자, 미친 사람들. <내 심장을 쏴라>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일부 챕터가 정신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그 속의 존재들을 미쳤다고 규정하는 세상에 대해 고찰해보게 한다. 은백이 병동을 나온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마주하는 인물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탑골 공원을 떠도는 누더기 입은 거렁뱅이 노파, 산에 은거하는 수묵화 <외엽일란도>의 대가 고산묵월과 낙원동 저자거리에서 빌어먹고 살다 고산에게 거두어진 아이 ‘득우’.

김홍도, <고목석죽도>
‘”제가 어떤 방법으로 이 그림 속을 드나들 수가 있겠습니까.” 강은백이 물었다. (…) 한참 만에야 노파는 입을 열었다. “저 세속의 소인배들은 버리려고 이 세상에 찾아와서는 모으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네. 자네는 어떠한가.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고 있다고 자신 있게 내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 아직도 자네의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집착의 찌꺼기들이 내 눈에는 보이는데.”
“무엇에 대한 집착입니까.”
“바로 오학동에 대한 집착과 이 그림에 대한 집착이라네.”’
그렇게 은백을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 마침내 한 데 모였다. 어느덧 불혹에 이른 은백은 이들 모두와 태함산 정상에서 만나, 노파의 말에 따라 평생을 간직해왔던 벽오금학도를 찢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을 가두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편재에 이르게 되고, 오학동으로 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어딘가에 정말로 우리가 전혀 의식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벽오금학도>는 기인으로 불렸던 작가 故 이외수가 방문에 철창을 만들어 달고 스스로를 통제하며 4년 간 집필한 소설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내 심장을 쏴라>보다 한 층 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도식으로 다가온다. 책은 백발의 청년 은백이 오학동으로 가기 위해 수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속을 방황하는 여정을 그린 일대기인 동시에,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세태 비판 소설이다. 또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을 풀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별들의 바다, 그리고 오학동을 향한 여정: <내 심장을 쏴라>와 <벽오금학도>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이제야 저 그림을 찢을 수 있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네가 우주의 중심부이니라.”
– <벽오금학도>
“이제 빼앗기지 마. 네 시간은 네 거야.”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 <내 심장을 쏴라>
책의 말미, 은백은 달이 뜬 태함산의 정상에서 비로소 벽오금학도를 찢고 오학동으로 사라진다. 승민은 수명에게 시계를 건넨 뒤, 마침내 글라이더를 타고 수리봉의 절벽 끝으로 뛰어내린다. <내 심장을 쏴라>와 <벽오금학도>는 서로 다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야기의 끝이 아주 비슷하다. 뒤틀린 세태, 한없이 도망치고 싶은 세상 속에서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아낸 존재들.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생을 이어 살아가는 존재들. 두 이야기 속에서 생은 순환한다. 승민에서 수명으로, 은백에서 득우로 이어지는 파종자와 씨앗의 은유가 공통된 감각으로 와닿았다.
더구나 두 소설의 주인공들 모두 가고자 하는 곳이 명확하다. <벽오금학도>는 세태 비판적인 코드가 더 짙음에도 불구하고, 오학동이라는 신선들만이 사는 곳, 일종의 유토피아를 상정한다. 은백이 그곳이 닿기 위해 노력하는 여정을 장장 290 페이지에 걸쳐 풀어내지만, 결국 그 집착 자체를 버리는 것, ‘마음’ 먹기에 따라 편재에 이를 수 있다는 역설로 귀결된다. 저자는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오늘날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성찰해야 한다는 메세지 속에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세상과 공명하며 ‘편재’될 수 있는,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열어 두는 통찰을 내 보였다. ‘본심본’ 마음의 근본은 곧 도의 하나라는 천부경의 구절을 인용해 집착과 회피 모두 내려놓고, 오직 나 자체만을 남겨 빛과 바람을 가르게 두는 것 -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이야기했다.

승민은 패러글라이딩 하며 수리봉 정상에서 몸을 던졌고 은백은 태함산 정상에서 그림을 찢어내고 환한 빛을 내며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은백은 정말 모든 것과 하나되고 공이 될 수 있는 오학동에 이르긴 한 것인가? 승민은 별들의 바다에 도착하였을까? 사실 오학동이라는 유토피아가 있는지도 우리는 모른다. 책에서는 암시한다. 오학동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집착과 환상을 버려야 그 곳에 이를 수 있다고.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는 속세로부터 사라진 은백의 선택을 죽음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내 심장을 쏴라> 역시 대놓고 승민의 자살을 명시한다. 책의 말미, 정신감정위원회 사람들은 수명에게 승민의 마지막 비행을 도운 것을 ‘자살방조죄’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수명에게 승민은 죽음이나 삶으로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승민 자체로 존재했다. 어떤 개념이 가 닿지 않는 다른 차원의 것. <벽오금학도>에서도 세상엔 현실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혹자는 승민과 은백이 삶으로부터 도피한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굴레로부터 벗어나 제 마음이 이끄는 그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난 것이다.
스스로를 묶어놓던 굴레. 그것은 어쩌면 승민처럼 점차 잃어가는 눈, 그리고 집안 갈등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갇힌 절망적인 신세일 수도 있고, 은백처럼 속세에 적응해 살지 못하는 괴로움과 제 마음 한 켠에 품어왔던 오학동이라는 초월적 유토피아에 대한 내적 갈망일 수도 있다. 그러한 족쇄로부터 벗어나고자 – 그 곳에 도달하는 길이 아무리 진창이며 먼 길일지라도 – 오롯이 제 자신을 위해 걸어가며 분투하는 모습은 얼마나 한없이 아름다운가.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택한 것은 그들만의 자유, 그들만의 삶이었기에.

더구나 저자들은 승민과 은백을 지켜보았던 목격자인 동시에 세상에 여전히 발 딛고 서있는 주체들을 남겨두었다. 수명과 득우는 신기루와 같았던 두 사람 자체를 통해 앞으로 변화하게 될, 어쩌면 우리 독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승민과 은백으로 표상되는 – 강렬한 목적과 동기를 지니고 분투해 제 의지대로 삶을 정한 이들과, 수명과 득우처럼 – 두려움과 어리석음, 가슴에 들이댄 총구로 가득할 세상 속에서도 삶을 이어 나갈 이들. 그렇다. 두 책은 자신만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든 청춘의 형태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말한다.
두 권의 책을 다 읽었다. 은백은 비로소 오학동에 이르렀다. 모든 것과 편재될 수 있는 그 곳에 다다랐을 것이다. 득우가 진정으로 불법에 귀의하거나 자신만의 또 다른 길을 개척할 것이 보였다. 아직 깨우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득우는 가장 완전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민은 비로소 그토록 사랑했던 별들의 바다를 다시 만났다. 하늘을 가르며 자유를 영원히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수명은 비로소 자신만의 자유,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았다. 앞으로 제 삶에 무수한 두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수명이 그 모든 것을 헤쳐 나갈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현실에 남겨진 나를 마주했다. 내 눈 앞에 놓인 것은 생동하는 ‘나의 여정’이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세상이 두려울 때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해주는 발판 두 개를 손에 쥔 감각이었다. <내 심장을 쏴라>는 나만의 삶과 자유를 위해 당당히 나아가라고, 세상 쪽으로 나를 살며시 떠밀어주었다. <벽오금학도>는 결국 내가 어디를 향하든, 내 마음 속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 세상이 아무리 나를 향해 총구를 내밀어도 우주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나는 나로서 온전하다는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누구도, 어디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
이 두 권의 책을 나와 같은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는 바로 우리라는 공통된 주제의식 때문이다. 오래전의 책들이지만, 여전히 공감이 되는 것은 결국 그 시절에도, 오늘날에도 결국 우리 '청춘' 모두가 이러한 방황과 분투의 과정, 고민과 우울의 시간들을 거쳐간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는 책을 덮은 후 깨닫게 된다. 이 장편의 여정들 끝에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