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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살고 있는가.

    

하루에도 수십 번 화면을 열고, 무언가를 찍고, 올리고, 확인한다. 그 안에서 행복을 증명하고, 개성을 연출하고, 타인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 모든 바쁨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종종 이상한 공허함이다. 분명히 많은 것을 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살지 못한 것 같은 감각.

 

책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 은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인다.

 

저자는 현대인의 삶을 관통하는 세 가지 증상을 진단한다. 경험을 규정하는 화면, 달성해야 할 목표로 변질된 행복, 그리고 타인을 조각내어 소비하는 방식, 이 개념들은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풍경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아하게 사고하라는 것. 그러나 이 우아함은 세련됨이나 여유로움과는 다르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기준으로 잘 선택하는 능력이다. 완전해지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불완전한 채로 호기심을 갖고, 섬세하게 살아가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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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으로서의 삶


 

저자는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 연출. 우리는 삶을 살지 않고 삶을 연출한다. 이 연출의 무대가 된 것이 바로 화면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화면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토템으로 본다. 원시 사회에서 토템이 공동체의 중심에 놓여 모든 행위의 기준이 되었듯, 다중 화면은 현대인의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아 모든 경험의 기준이 되었다.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촬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게시한다. 화면이 경험을 매개하는 것을 넘어 경험 자체를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판텔라 토템, 즉 토템이 된 화면이라고 부른다.


이 화면 중심의 삶은 행복에 대한 관념도 바꿔놓았다. 저자가 포스트행복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그것이다. 과거에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덕스러운 삶을 살거나 뜻밖의 행운을 만났을 때 찾아오는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옴니스크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행복은 추구하고 달성하고 전시해야 할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행복이 목표가 된 순간, 아직 행복하지 않다는 감각이 일상이 된다. 저자는 이 변질된 행복 관념을 포스트행복이라 부르며, 이것이 현대인을 옥죄는 핵심 증상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타자와의 관계도 같은 논리로 변형되었다. 저자는 타자식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현대의 하이퍼모던 주체는 타인을 온전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다. 타인을 소비 가능한 조각으로 분절하여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타인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이 행태를 저자는 타자식, 즉 타자를 먹어치운다는 표현으로 압축한다. 이때 타인의 존엄은 훼손된다. 존엄이란 타인을 복잡한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포스트행복, 판텔라 토템, 타자식. 이 세 개념은 각각 다른 현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삶이 수행과 전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을 수행하고, 경험을 수행하고, 관계를 수행한다. 그 수행의 피로가 현대인이 느끼는 공허의 정체다.

 

 

 

# 다름에서 구별됨으로


 

저자는 하이퍼모던 주체를 한 가지 특성으로 요약한다. 그는 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다름을 연출하기 위해 모두가 쓰는 코드를 그대로 사용한다. 같은 필터, 같은 문체, 같은 서사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 이 역설 속에서 하이퍼모던 주체는 다르지만 구별되지 않는다.


저자가 우아한 사고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구별됨이다. 다름은 기존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구별됨은 그 위로 상승하는 것이다. 다름은 항상 기준점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과 규범을 의식해야 한다. 반면 구별됨은 그 긴장에서 자유롭다. 저자에 따르면 우아한 사람은 타인과 다르게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잘 선택할 뿐이다.


우아함의 어원은 라틴어 eligĕre, 즉 잘 선택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 어원에서 우아함의 본질을 끌어낸다. 우아한 사고란 화려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세하고 고요하며,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 우아한 사고는 외부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이 비판적 사고의 가장 높은 표현이라고 말한다.


우아한 사고가 가능하려면 호기심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호기심의 어원에는 '돌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아하게 사고하는 사람은 세부를 돌보고, 맥락을 돌보고, 타인을 돌본다. 그 돌봄 위에서 비로소 잘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정신적 빈곤이라는 진단


 

저자가 제안하는 개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신적 빈곤자다. 복잡하고 과잉 자극적인 현실 앞에서 지적 도구를 잃어버린 채 스스로를 지적 빈곤자로 선언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정신적 빈곤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다. 정보는 넘친다. 문제는 그 정보를 가공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판텔라 토템이 제공하는 자극은 끊임없고 즉각적이어서, 멈추고 사유할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포스트행복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로 부유하고, 타자식은 관계를 얕게 만들며, 불완전하다는 감각은 커져만 간다.


저자는 이 불완전함의 감각이 현대인의 고통 중 상당 부분을 구성한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책의 제목 자체가 그 불완전함을 긍정한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것들, Incompletos. 저자는 불완전함을 극복해야 할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서 우아한 사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완전해지려는 강박이 정신적 빈곤을 낳는다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로부터의 출구가 되는 셈이다.

 

 

 

#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


 

저자의 진단은 한국 독자에게 낯설지 않다. 판텔라 토템의 풍경은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을 가진 한국에서 더욱 선명하게 펼쳐진다. 포스트행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소셜 미디어에서 행복을 전시하고 인증하는 문화는 한국 사회에서도 일상이 되었다. 타자식의 논리 역시 빠른 소비와 짧은 관계의 문화 속에서 낯익은 풍경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책을 읽을 때 공명하면서도 어딘가 다르게 들리는 지점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우아한 사고, 잘 선택하는 능력은 개인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선택은 종종 생존의 문제로 경험된다. 대학 입시, 취업, 경쟁적 자기계발의 압력 속에서 잘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유의 문제라기보다 탈락하지 않기 위한 계산의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처방이 한국 독자에게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구별됨, 즉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기만의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한국 문화의 여백이나 무위 개념과 멀지 않다. 채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여백의 미학, 억지스러운 행위를 멈추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무위의 태도는 저자가 말하는 우아함과 다른 언어로 같은 지향을 가리킨다.


다시 책의 제목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자는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때 주목해야할 점은 이 불완전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완전해지려는 강박이 포스트행복을 낳고, 포스트행복이 정신적 빈곤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설적으로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 그것이 저자가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핵심적인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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