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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그들의 봄은 너무 늦게 왔다 - 돔박아시, 고이래 [공연]

80년 전 제주의 기억이 끝내 남긴 것들

by 김현진 에디터
2026.04.12 18:21

 

 

제목부터 독특한 연극 <돔박아시, 고이래>를 보았다. 국가유공자 '채진광'의 동상을 훼손한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있는 나이 든 해녀 '고이래'는 말없이 연신 '동백 아가씨'만을 부른다.

  

고운정과 윤상진의 귀한 딸 '윤이래'는, 어쩌다 혈혈단신 '고이래'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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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수년에 걸쳐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진상 규명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유사한 다른 사건들에 비해 현재까지도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래서 4월의 대학로에서 제주의 봄을 담은 이 연극이 공연되는 것이 더욱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고이래다. 관객들은 그녀의 과거를 따라가며, 고이래가 왜 채진광의 동상을 무너뜨려야 했는지, 어떻게 저토록 초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감옥에 가더라도 사과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이래의 대사에서 결국 눈물이 흘렀다. 이제 외롭지 않다는 말은, 그녀가 평생 얼마나 지독히 외로웠을지를 와닿게 했다.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부모와 자기 자신을 숨기며 산 그녀가 이제야 비로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그녀를 지지해 주는 해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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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모든 인물에게 저마다의 감추어진 서사가 있었고,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 있었다.


우선 고이래의 부모인 고운정과 윤상진이 있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던 그들의 삶은 시대 속에서 파괴당하고 만다. 그 주체였던 채진광이 정작 국가유공자로 추대되고, 그 손자인 채도엽이 호의호식하며 해녀들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비극의 굴레가 보는 이를 가슴 아프고 답답하게 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춘옥과 송인우 모자의 이야기다. 춘옥은 과거 운정의 친구였지만, 결국 그녀에게 큰 죄를 짓고 만 인물이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며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춘옥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춘옥이 얼마나 오랫동안 괴로움에 떨었을지, 그럼에도 운정과 이래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냈을지를 헤아려보게 된다. 춘옥 역시 연약한 피해자라는 것을.


마지막으로는 강철구와 강선웅 부자가 있다. 강철구 덕에 유복하게 자란 강선웅은 고이래를 담당한 경찰이기도 하다. 그는 채진광과 윤상진의 부하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과거를 알아가며, 자신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최근 읽은 <빛과 멜로디>라는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철구도 일종의 80년 된 부상병인 것일까 싶기도 하다. 상관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던.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한 윤상진이 존재하는 한, 강철구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근본적으로는 폭력에 대한 환멸로 이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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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근의 역사 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로서, 노인분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트라우마에 여전히 고통받고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래의 부모가 밝혀지면 큰일 날 것처럼 굴고, 아들 인우에게 주의를 주는 춘옥의 모습이 그래서 충격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녔다. 채도엽 일당을 보면 세상이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또 이런 지점에서는 세상이 많이 변한 것도 같다.


다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죄수복을 벗지 못하는 고이래의 모습은, 세상이 지금보다 더 변해야 한다는 사실도 똑똑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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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적 측면에서는 넘어진 동상을 암전될 때마다 시계추처럼 돌려가며 장면을 전환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또, 내용 특성상 과거 회상이 많았는데, 본무대 뒤편에 커튼과 함께 작은 무대를 하나 더 두어,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자막을 제공해 가며 생생하게 구사한 제주 방언의 역할도 컸다.


서사의 규모와 메시지를 봤을 때, 영화 같은 다른 매체로 옮겨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도 곧 개봉하는 만큼, 해당 사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높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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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는 동백꽃과 관련해 이런 언급이 있었다. 빨간 동백꽃을 보면 피로 물든 사람들이 떠올라 힘들다고. 하지만 상진이 운정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그 꽃다발처럼, 동백꽃은 흰색도 있다. 흰 동백꽃의 꽃말은 비밀스러운 사랑, 그리고 굳은 약속.


운정과 상진, 이래의 사랑이 더이상 비밀스럽지 않아도 되기를. 그리고 우리는 80년 전 제주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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