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년'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가는 지금. 표지 전면에 '백수'라는 단어를 내세운 책을 만났다. 바로 고성배 작가의 <백수의 권>이다.
처음에는 빨간 표지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두 번째로는 '백수'의 권법(?)을 다룬다는 제목에 홀린 듯 손을 뻗었고, 마지막으로는 무림 고수나 다름없는 몸짓을 보이는 저자의 사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첫 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배우는 신개념 방구석 권법 입문서'라니. 이제는 무림고수 같은 스승 없이도 방구석에서 권법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 책의 저자인 고성배 작가야말로 고단한 백수의 시기를 거쳐간, 경지의 오른 스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첫 번째. 이 책은 도대체 무슨 책인가? 대답하자면, 정말 농담이 아니라 '백수권'을 익히는 법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백수권의 기원과 역사'에 따르면, 백수권은 태극권이나 취권처럼 메이저 한 권법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백수에게서 영감을 받아 창시된 백수권은, 이를 계승해야 할 백수가 취업이 되면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므로 늘 명맥을 잇지 못하고 사라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호라.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넘기면, 권법을 시작하기 전 유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읊어준다.
백수란 슬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기나긴 슬픔의 시간을
심신 단련의 기회로 삼는다면
그 파워는 어떠할까?
앞날은 캄캄한데 당장 나는 쓸모가 없어 보이고. 그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백지 같은 상황에서야 단련할 수 있는 권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프롤로그가 끝난다. 이제 책은 차례로 백수권의 '수형'과 '기본자세'를 알려준다. 스트레칭 코너라고 해야 할까. 이후 열다섯 가지의 '동작'이 시작되는데 바퀴타법부터 시작해 묵언수행까지. 듣기만 해도 흥미로운, '백수라' 익힐 수 있는 다양한 권법의 파노라마를 지나다 보면 마지막 코너인 '초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만큼 백수권의 프로그램은 상당히 디테일하다.
이제 저자가 발굴한 백수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겠다. 그러나 들어가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백수권의 기술은 실제 인간에게 사용하거나 함부로 남발해선 안 된다. 이 기술들은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예전에 스치듯이 보았던 영화들이 떠오른다. 가령 무술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명에 따라 묵묵히 청소만 하던 주인공의 모습 같은 것. 백수권 역시 곧장 자세부터 배울 순 없다. 우리는 일단 '수형'부터 알아야 한다.
수형은 '손의 모양'을 뜻한다. 책에서는 다양한 수형의 예시를 보여주는데, 베이스는 모두 취준생의 일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돈육국수'는 늦은 밤 몰래 주방에서 찌개를 뒤적이며 고기를 빼먹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존심장'의 날카로운 손짓은 누군가 당신을 깎아내릴 때 당당하게 내밀기 좋은 수형이다. 저자는 수형을 알려주다가도 틈틈이 따뜻한 말을 건넨다. 가령, 취업은 결국 신의 타이밍이라는 것. 그러니 모든 일에 자책하거나 기분을 하락시키지는 말자는 것.
그렇게 몇 가지 수형을 배우고 나면 이제 기본자세를 배울 수 있다.
백수권은 크게 3가지 자세로 나뉘는데, 비유하자면 태권도의 주춤서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기나긴 백수 생활 끝에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백수권이기에 부자연스럽거나 억지가 들어간 것은 일단 배제해야 한다.
첫 번째 자세는 바로 '관찰자' 자세다. 늘 긴장을 품고 사는 백수에게 있어 '관찰'이란 애써 체득하려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익힐 수 있는 습성이다. 이 자세의 가장 큰 원동력은 '긴장'이니까. 수련이 마스터급에 이르게 되면 개미 소리까지 알아챌 수 있다고 하지만, 저자는 이 정도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내비친다.
수형과 자세까지 익혔다면, 이제 드디어 동작을 배울 차례다. 책에서는 열다섯 가지의 동작을 알려주는데, 이를테면 '자아도취' 같은 동작이다. 샤워를 끝내고 가끔 거울을 볼 때 스스로에게 취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작이다. 게다가 취업을 할 때를 대비해 가장 멋진 옷을 입어보는 등 일상 전체가 취업과 맞닿아 있다는 불안감까지 함께 보여준다.
위 동작 외에도 다채로운 백수권 동작들을 보며 시종일관 저자의 기막힌 상상력과 재치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하지만 또 마음 한편으로는 무직 상태가 주는 불안감과 절망, 슬픔을 이렇게 유머로 소화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한 복잡다단한 감상 속 열다섯 동작을 넘어가면 대망의 마지막 단계인 '초식'을 배울 수 있다.
이 초식의 이름은 '소식유희면배설'이다. 풀어 말하자면, '적게 먹고 놀고 자고 화장실을 간다'라는 말이다. 사회에서 보는 백수에 대한 인식을 비꼬듯 보여주는 초식으로, 사실 백수의 하루는 다채롭다는 걸 나타내고자 했다는데.
앞선 동작들을 토대로 만든 '초식유희면배설'은 무려 60개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초식을 완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나온 동작들을 유려하게 연결하는 저자의 내공을 엿보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제 마지막 코너인 응원의 말로 <백수의 권>은 막을 내린다.
*
취업이라는 막막한 글자는 나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단어이다. 그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이직을 앞두고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와중 항상 가족의 눈치와 불안함 속에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 잠을 자면 붙는 꿈과 떨어지는 꿈을 동시에 꿨고, 친구들의 취업 소식은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평생 가는 것도 아니었고, 언젠가는 '끝' 있다는 걸 안다는 저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이라도 하며 자존감을 높여보라고 말해준다.
취업 준비생, 취업 준비를 준비하는 준비생, 또는 쉬었음 청년 같은 말들이 현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지금. 이 책은 집에서 눈치를 보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백수들에게 말한다. 백수권은 당신의 삶을 바꿀 무술은 아니라고. 단지 무료하고 심심하고 초조한 백수 생활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될 수 있는 취미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시종일관 진지한 저자의 모습(사진 속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가 실제 저자다)과 재치 넘치는 부연 설명을 보다 보면, 금세 이 책의 매력에 빠져든다. 취준생의 지난하고 고단한 생활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저자의 모습에 정말 한 수 배우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 저자, 아니 스승님의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몰래 집에서 백수권을 연마하다 보면 지금의 불안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희석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취준생, TEAM백수를 응원하는 마음을 안고 오늘도 백수권 연마에 매진해 보도록 하겠다. 어디 보자... 참고로 나는 이제 수형과 기본자세는 마스터했으며, 동작 중에서도 열한 번째 동작. 후각집중을 연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