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읽는 이유 - 인생의 역사 [도서]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글 입력 2023.03.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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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를 읽는가. 이를 논하려면 먼저 내게 시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내게 시는 애증 그 이상의 무엇이다.

 

나는 문학을 전공했다. 세부 전공은 시나 소설이 아닌, 어떻게 보면 (그나마) 상업성이 있는 전공을 택했지만, 세부 전공을 확정하기 전까지 나는 시 창작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처음 친해진 친구는 시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며 오랜 룸메이트 역시 새내기 시절부터 시를 읽고 쓴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무엇인가. 그 고민은 꽤 오래 나를 괴롭혔다. 시로 등단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자주 동기들의 시를 읽고 서점에 가면 뇌리에 남은 시인들의 신간을 사 읽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를 따라 시를 읽어본 언니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라며 금방 읽기를 포기했었고 나 역시도 모든 시를 이해하려 애썼기 때문에 그 과정은 오히려 나를 괴롭게 했다. (지금은 ‘모두 이해하기’가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굳이 정신을 지치게 하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시를 쓰지 않지만, 시를 계속 읽는다. 이 의문은 결국 ‘나는 왜 시를 읽고 있는가.’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시인과 시집을 뽑을 수 있을 무렵까지 시를 읽고 나서야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를 정돈된 말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몰랐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를 『인생의 역사』를 통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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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_『인생의 역사』 87p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라는 말은 책의 제목을 풀어쓴 것처럼 읽혔다. 사실 위의 말은 ‘시’를 ‘책’으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더 나아가자면, 나는 왜 책을 읽는가의 답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는 행위가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라 했다. ‘해상도가 높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건 사진 촬영만큼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선명할수록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명히 알수록 괴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 사서 고생하는 행위를 하는지 조롱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관해 신형철은 『고독의 매뉴얼』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말한다.

 

 

“누구도 금지된 사랑에 매달린 두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도청을 사수했던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갈릴레이의 미친 지동설을 믿지 않는다. 귀를 자른 화가의 작품을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의 그들은 당신들의 평범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고독의 매뉴얼』)”


 

어떻게 보면 저 말이 진실이기를 굳건히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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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시를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읽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다른 감상을 느꼈다. 나 역시 「가지 않은 길」을 이전까지는 하나의 해석만으로 읽어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발자취를 남겨둔 평탄한 길을 두고 험한 길을 걷는, 자의로 선택한 고독과 그 아래에 깔린 굳센 선언으로 지금까지 이 시를 읽었지만, 필자는 「가지 않은 길」의 두 길이 사실 별 차이가 없음을 언급한다. 즉, 이 시를 다른 방향으로 읽을 가능성을 찾았다.

 

시는 인생이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작품은 길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시의 처음으로 돌아가 작품을 다시 읽고, 그사이에 남은 여러 갈래의 길을 전부 다 걸을 수 있다며 분리했다. 즉,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말이 퍽 가슴을 울렸다. 나는 좋았던 책을 읽자마자 다시 읽거나, 혹은 수년이 지나 다시 읽는다. 여전히 가슴을 울릴 때도 있고 이전보다 더 좋을 때도 있고, 혹은 이전과는 달리 감흥이 없을 때도 있다. 더 많은 게 눈에 보일 때면 내적 성장에 약간의 성취를 느끼기도 하고, 혹은 어릴 적 취향에 대해 반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은 ‘리셋’할 수 없지만, 독서는 다시 처음이 가능하다. 재정비하는 과정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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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돌아와서 말해보자면, 나는 여전히 시가 어렵다. 내가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글이라면 다 읽던 시절의 시와, 우울함에 젖어 읽었던 시, 그리고 과제를 위해 읽었던 시를 거쳐 시를 썼었고 이젠 시를 쓰지 않는다. 여전히 시를 쓰는 동기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시를 쓰는 동력이 계속 나오는 그 원천을 시샘했다.

 

 

“인간의 한평생이 타인에게는 시 한 편만큼의 가치를 갖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할 때 나는 시 앞에서, 자연 앞에서 그렇듯, 오만해질 수가 없다.”


 

『인생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공감한 문장이다. 자의식이 강한 인간은 누군가에게 그만큼의 영향을 주고 싶지만, 타인에게 “시 한 편만큼의 가치”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어렵다. 시를 쓴 시인은 타인이지만, 정작 우리는 시인이 아닌, 그가 쓴 시를 거쳐 그 한 문장을 더듬으며 삶을 살아간다.

 

내게 그 한 문장은 김선재의 시 「목성에서의 하루」였다. 생일 선물로 받은 시집에 수록된 이 시는 ‘하루라도 다 같은 하루는 아니어서 / 나는 여기 있어요’라는 문장으로 시를 시작한다. 유독 힘든 날이면 이 문장을 곱씹는다. 꼭꼭. 언젠가 소화될 수 있음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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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를 읽고 글을 쓰면서, 사실 이것 말고도 내뱉고 싶은 말이 넘쳐났지만, 맥락상의 문제로 미처 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만 꼽아보자면, W.H.오든의 「장례식 블루스」를 다루며 기타노 다케시의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를 인용한 것이었다.

 

이 문장은 언제쯤 유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의 역사』에서는 ‘세월호’와 ‘코로나 시대’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이후 이태원에서 일어난 10·29 참사를 잊지 않았다. 다음으로 인용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책을 읽고 씀으로 “애도의 출발”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유효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생의 역사』에서처럼 하나의 흔적이라도 남기를 바란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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