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끝장 나는 영화를 봤다. 측근이 극찬을 했던 터라, 아끼고 아껴서 보았는데도 훌륭했다. 내가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라. 누군가 나의 인생을 묻는다면,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라. 분위기나 연출이 내 스타일이라고 말 하기는 어렵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좋았다. 뒤죽박죽 얼렁뚱땅 정신없는 흐름. 그 속에서 빛나는 교훈. 뻔한 걸 뻔하지 않게 제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줄여서 에에올이다. 모든 것, 모든 곳, 한꺼번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제목. 영화를 재생하기 전까지는 당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곧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과 터무니없는 설정과 웃음 포인트. SF와 액션, 코미디, 판타지, 철학의 경계를 마구 드나들며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혹자가 나에게 이 영화를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꽤 오래 입을 옴짝달싹할 듯한데. 할 말이 너무 많고 중요한 것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멀티버스를 혼란케 하는 절대 악, 조부 투파키에 대응하는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게 올바른 설명법을 찾아 이것저것을 재끼고 더 나은 표현을 위해 헤매다 보면.. 그저 이 영화를 봐라! 라는 말 밖에 남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혼재되어 엉망진창 진행되는 이 영화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여 설명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이 영화만이 설명할 수 있다.

엄마 에블린은 코인 세탁소를 하며 세금을 내야하고, 그의 딸 조이는 동성애자로 엄마를 그리고 사회를 납득시키며 살아가야 한다. 착해 빠진 남편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도통 도움이 되질 않아 보인다. 잠깐만 보아도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이혼 서류와 세무 조사에 시달리는 에블린은 다른 차원에서 온 웨이먼드를 만나며 멀티 버스를 넘나드는 경험이 시작된다.

 조부 투파키가 에블린의 딸 조이라는 것. 무적 손가락을 가진 쿵푸에게로 점프하는 것. 세 손가락 모두 종이에 베이게 하거나, 발차기하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버스 점프할 수 있다는 것도 사랑스럽다. 웨이먼드가 어디에나 붙여놓은 장난감 눈알.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상 속에서의 사랑법. 라따구리를 잃을 수 없던 셰프 또한 즐겁다. 누가 주인공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각자의 몫을 완벽히 해내는 그들. 그 무엇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음. 멀티버스라니. 코인 세탁기와 세무조사,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에 시달리던 우리에겐 다소 뜬금없이 다가오지만. 멀티버스 그 자체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바로 '순간의 선택들' 인데. 좀 더 근본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중첩성이나 혼재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내가 과학을 전혀 모르는 나는. 막무가내로 멀티버스를 양자역학과 겹쳐서 본다. 나의 매 순간의 선택에 따라 '내'가 여러 '내'가 되어서 어딘가에 존재하고, 거기에서 여전히 살아 나가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 수많은 '나'는 내가 인지할 때에서야 나의 우주에 생성되고, 직접 버스 점프를 해서 넘어가야만 접촉할 수 있다. 마치 관측하는 순간 성질이 바뀌는. 그전까지는 그저 확률로만 존재하는 미립자들처럼 말이다. (모든 우주의 것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대사와 함께 화면에 비치는 장난감 눈알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립자의 진동 속에서, 그 수많은 우주들의 흔들림 속에서 한 줌의 시간은. 우주와 양자를 엮어서. 결국 나와 원자를 동일 시켜보는 체험을 제공한다. '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더 독립적이지 않고, 모든 나와 매우 유사하지만 또 동시에 다르고, 그럼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 관측하고 있다는 것. 결국 나의 모든 선택, 모든 가능성, 모든 우주를 종합한 것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는 결국,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연습을 한다.

가족이라는 형태의 관계가 폭력적이라고 느끼던 적이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끊어낼 수 있지만, 혈연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서도 끊어버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토록 필연적인 관계는 절대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만큼 또다시 필연적인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영화 너머에서부터 느껴지는 깊은 감정의 골. 더 이상 말이 말 그대로 들리지 않고, 행동이 행동 그대로 보이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음이 보인다. 언제가 시작인지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져 온 무언가는 속에서 뒤엉켜서 형태를 알지 못하는 감정 덩어리로 자리 잡는다. 웨이먼드와 에블린도, 아빠와 에블린도 그러하다.

에블린은 착하고 순진하고 멍청한 그의 남편 웨이먼드를. 그를 선택한 나를. 나를 막지 않은 아빠를 원망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답답할 정도로 순한 남편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무시했으리라. 그러나 에블린은 멀티버스를 탐험하며, 웨이먼드와 함께 가지 않은 '나'와 웨이먼드를 만난다. 그러고는 깨닫는다. 웨이먼드는 사실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가 살아남은 방식은 다정함이고. 그 다정함은 결국 통한다.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다정함은 물과 같다. 물은 조용하고 유연하지만, 또 때로는 바위를 뚫을 만큼 강하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물이 필요하다. 엘리멘탈의 웨이드처럼,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웨이먼드. 에블린도 그의 물길을 이어 가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난 너와 여기 있고 싶다고 말하는 에블린은. 나의 모든 시간과 공간 어떤 인생을 살아도, 그럼에도 조이를 선택하고 웨이먼드를 선택할 에블린은. 드디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너를 구할 거야- 라는 말은 곧 나는 나를 구할 거야- 라고 들리며, 조이를 안고 웨이먼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에블린이 비쳐 보인다.

서로 입 맞추도록 하고, 포옹하도록 만들며 오직 다정함으로 싸우는 장면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사랑스럽다. 유튜브를 한때 뜨겁게 만든. 봐도 봐도 여전히 울컥하는. 취객을 안아주던 젊은 청년의 영상이 떠오른다. 우리 집 가훈 상선 약수(上善若水)가 생각나고, 아이유의 Love wins all도, 아까 오전에 읽던 젊은 베르테르의 정열적인 고백이 스쳐 지나간다. 역시나. 사랑은 강하구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유치환을 좋아하는 나는. <바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무주의, 니힐리즘의 끝인 바위. 에에올의 돌멩이도 그러하다. 모든 멀티버스를 탐험하고, 모든 자극과 경험, 즉 문자 그대로의 '모든 것'을 겪은 조부는 결국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Nothing matters라는 진리를 발견하고선 삶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의미도 찾지 못한다. 그저 이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하여 베이글에 모든 것을 올린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조부는 자신을 파괴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치환의 허무에서 생명력을 찾았듯이, 조부의 까만 베이글에서 까만 눈동자를 찾아낸다. 삶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 그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부는 본인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에블린,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길을 찾아낼 에블린을 기대했고. 결국 찾아냈고. 삶을 지켜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나서... Nothing matters는 곧 everything matters이기에. 무의미는 의미이고, 덧없음은 덧있음이기에. 한 줌의 시간 속에서. 우주가 보내준 사람들을 사랑하며. 다정하게 살아가는 것.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오직 그것이면 된다!